기껏해야 행성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바로 '부모는 자식의 전부', '부모는 아이의 우주', '부모는 아이의 세계'. 어린 아동에게 부모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는지, 부모가 그 자체로 아이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차원의 이야기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보다가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건 너무... 부담스럽잖아?
아동의 삶에 부모가 끼치는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동의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상처받는 경험도, 누군가에게는 때로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니까.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나도 꽤 아팠다. 지금도 다 나았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의 우주'라고 하기에는 좀 섣부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커봐야 행성 정도랄까? 드넓은 우주 한복판에 왜소하게 떠다니는 행성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어린 시절의 아픔, 특히 부모로부터 받은 아픔을 되새김질하며 성인기에 겪는 어려움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문화가 견고히 자리잡아 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이 담론에서 특히나 불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모친이다. 엄마가 단호해서, 엄마가 물러서, 엄마가 일을 하는 바람에, 엄마가 일을 안하는 바람에, 엄마가 놀아주지 않아서, 엄마가 지나치게 놀아줘서, 엄마가 방치해서, 엄마가 집착해서, 엄마가 감정적으로 예민해서, 엄마가 감정적으로 무뎌서, 엄마가 지저분해서, 엄마가 결벽증이어서, 엄마가, 엄마가, 엄마가. 엄마는 아이의 우주이니까, 마땅히 우주답게 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것.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안타깝게도 엄마는 절대 성공할 수가 없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유독 엄마를 지목해 꾸중하는 경향성이 짙어진 건 나만 느끼는 불편함일까?
부모는 자식의 전부가 아니다. 그랬다면 나는 너무도 절망했을 테다. 우리 부모는 내게 드넓은 우주 속 아주 작은 행성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부모가 아닌 사람들을 통해 더 많은 세계를 만났다. 또 다른 행성, 별, 성운, 우주먼지, 블랙홀, 은하... 나의 우주에는 새로운 존재들이 차고 넘쳤다. 나는 그 속에서 나만의 독특한 행성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내 아이의 전부가 되지 않길 바란다.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행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수없이 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겨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