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저도 아닌 나
어렸을 때는 꿈을 항상 명사로 이야기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알았나보다. 어른들이 듣고 싶어하는 꿈이란 명사여야만 하는 거라고. 선생님, 대통령, 은행원, 패션 디자이너, 간호사, 화가, 등등.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사로서의 미래. 나는 그래서 나 역시도 명사처럼 명확하고 오인의 여지가 없는 삶을 살 것이라 착각했었다. 지금처럼 애매한 삶은 상상해본 적도, 바란 적도 없다.
내 삶이 애매해지기 시작한 건 대학에 진학하고서부터였다. 너무나 많은 기회, 너무나 많은 시간, 그리고 너무나 많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나는 점점 애매해지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도 애매한 건 안좋은 거라고,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애매한 기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성화였다. 그래서 하루 빨리 명확해지기 위해, 애매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내 삶에서 애매한 요소들을 하나 둘 쳐나가기 시작했다. 애매하게 잘하는 것들, 애매하게 좋아하는 것들, 애매하게 바라는 것들을 모조리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지금의 내가 남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애매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고보니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바로 그 애매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생물학적 여성이지만 남성적인 면도 갖고 있다. 나는 인문학을 전공했지만 돈에도 관심이 많다. 나는 내 엄마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불편해한다. 나는 안전한 가정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고 싶지만 동시에 나만의 자유도 누리고 싶어한다. 나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만 때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고 싶다. 나는 예민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도 둔하다. 나는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한다. 나는 아주아주 자애로운 어머니였다가 한 순간 용가리같은 못된 엄마가 된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했다가 증오했다가 한다. 나는 정말로 애매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애매한 사람이 애매한 삶을 살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가?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가진 모임에서 나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를 몇 개의 짧은 명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당당하고 빛나는 이들 앞에서 어느 순간 나는 내 존재를 대강 얼버무리며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임의 공기도 애매해져버린 건 덤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한동안 매우 우울했다. 결국 나는 애매함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영영 도망칠 순 없겠구나, 하고. 그러나 애매한 삶을 산다는 게 그렇게 꼭 나쁜 일인가, 물으면 또 명확하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글쎄, 그렇게 나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이렇게 그저 애매한 결론만 내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