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안전하다는 걸 느낄 때
국립극장에서 하는 연극 <그의 어머니>를 보고 왔다. 아들이 하룻밤 사이에 3명의 여학생을 강간한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데, 극 특성상 매우 폭력적인 대사와 제스처,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나는 이 연극을 관람하면서 문득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를 낳기 전으로, 결혼하기 전으로. 폭력은 내게 일상이었다. 언어폭력, 신체폭력, 그리고 성폭력.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고성, 고함, 욕설, 분노와 경멸, 긴장과 두려움, 폭발과 좌절. 연극을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난 후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마도 나같은 사람을 위해 <그의 어머니> 홍보팀에서 미리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을 명시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연극이 끝난 후 돌아와서도 한동안 마음이 쉽게 추슬러지지 않아 이리저리 애꿎은 집안일만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다시 문득, 내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게 되었다. 꼼지락거리는 아기와 그런 아기를 사랑스레 바라보고 있는 남편.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이곳 집 안에서는 따뜻한 조명이 비치고 그 아래 모락모락 김을 풍기고 있는 갓 지은 쌀밥이... "고생했어." 하루종일 나가 '놀다 온' 부인을 향해 남편이 다정히 건네는 한마디. 그때 내 마음이 내게 속삭였다. '이제 너는 안전해.' 맞다. 나는 이제 정말로 안전하다고, 이곳 우리집에는 더 이상 고성, 고함, 욕설, 분노와 경멸, 긴장과 두려움, 폭발과 좌절 따위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다고,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이제 폭력은 내게 일상이 아니라, 영화나 책, 연극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p.s.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은 <그의 어머니> 관람 전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