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발로 대학원을 나왔다. 정확히는 논문쓰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내 학력은 석사수료에 멎어있다.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내 젊음을 들이부었던 학문을 내 손으로 놓아버리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통과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학문에 작별을 고했다. 아니, 학문이 아닌 학교에 작별을 고했다고 해야겠다. 나는 여성학이 미워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나는 여성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그토록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에 경악했을 따름이다.
국내에는 여성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한정적이므로, 신상보호를 위해 내가 배운 곳을 A학과라 부르겠다. 이곳 A에는 b라는 교수가 있었다. 그와 그의 강의는 학부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는 명석하고 통찰력있는 학문적 능력으로 널리 인정받은 전형적인 학자였다.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이 사람처럼만 연구하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을 다해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혹독하고 매서운 지도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건방진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은 맥락과 상황에 의존한다. 같은 말도 컨텍스트에 따라 아다르고 어다르게 들린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말들은 그런 것과 무관히 그 자체로 엄청난 존재감을 갖는다. 긍정적인 쪽으로든, 부정적인 쪽으로든. b교수의 말은 후자였다. 그의 말은 비수가 아니라 차라리 독극물에 가까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서서히 온몸으로 번지는 치명적인 독성. 좋든 싫든 그의 수업은 필수과목이었고 이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여러 말들 중 유독 이날까지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소란화가 겪었다는 성폭력은 폭력도 아니야. 그런 사람 쌔고 쌨어." 내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나는 가해자도 아닌 여성학 연구자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로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기에, 달리 어찌 해야할 지 몰라 그 말을 고스란히, 몸속 깊숙한 곳으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해,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몸 안에 무언가가 생겨서였다. 나는 놀랍게도 이 수업에서 A+를 받았다. b교수의 말대로 내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써냈고, 그는 내게 A+를 주며 말했다. "역시 누구든 굴려야 성과가 나온다니까."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는 서서히 학교와 멀어졌다. 내 아픔을 부정하는 곳을 학교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해지는 나 자신이, 인정받으려 몸부림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마침내 학교로부터 내 마음이 완전히 떠났을때, 같은 분야를 공부하던 지인이 말했다. "아깝다." 그랬다. 아까운 건 누구보나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교수로 군림하고 학문을 운운하는 곳에서 나의 글을 시험하고 나의 정신과 영혼을 난도질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나같은 진정성있는 사람을 품을 자격이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적어도 그 교수보다는 내게 여성학을 논할 자격이 더 많이 있다고, 나 스스로는 그리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자그마치 수년이 걸렸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어라 하든 결국 중도탈락한 나약한 포기자의 자기변명과 남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 속에서도 꿋꿋이, 심지어 수월하게 자기 작업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더욱 깊이 고개 숙이게 한다. 결과적으로 다 네 문제라고. 대학원에 적응하지 못한 죄, 홀로 순진했던 죄, 좀더 강단있게 굴줄 몰랐던 죄,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논문을 완성할만큼 똑똑하고 끈기있지 못했던 죄. 나는 온갖 죄책감 속에서 사람들과 단절하고 한동안 오롯이 홀로 있었다. 그 누구의 소식도 알고 싶지 않았고 한때 내가 전부를 바쳐 사랑했던 학문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눈 깜박할 새에 어느덧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b교수의 말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버려두고 단번에 돌아서버린 나 자신의 선택 또한 영영 잊히지 않을 것이다. 여성학, 아니, 여성학을 말하고 가르치고 배웠던 그 모든 사람들은 내 어리고 순수한 시절을 무참히 가로질러간 거대한 칼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