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사카성을 관람할 예정인데 걱정이 되었다. 비가 좀 많이 오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오긴 했지만 작은 삼단우산이다. 어제 사 온 컵라면과 빵으로 아침을 먹고 둘째 날 여행을 하기 위해 나섰다. 아침부터 하는 뷔페식당이 호텔 바로 옆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라면과 빵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아침 식사가 라면이 되어 버렸다.
주유 패스를 이용해서 히고바시 역에서 전철을 탔다. 주유 패스를 개찰구에 넣자, 구멍이 뚫리고 날짜가 찍혀서 다시 나왔다. 예전 기차표를 철도원 아저씨가 펀치로 구멍을 뚫어 주던 때가 생각났다. 일본은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혼합한 느낌이었다. 혼마치 역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오사카성이 눈앞에 보였지만 꽤 오래 걸었다. 비가 많이 와서 작은 우산에 옷과 신발은 푹 젖어버렸다. 걸을 때마다 절걱절걱 소리가 났다.
‘으으! 이런 기분 너무 싫다.’
가는 길에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옴 직한 오래된 가옥이 있었다. 지붕 모양이 허리가 잘록 들어간 모습의 집을 보니 일본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옷과 발이 푹 젖은 채 오사카성 특별전시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비가 와서 좀 추웠다. 비를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카페에 가서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명탐정 코난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커피 생각도 잠시 잊고 구경했다.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인물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 엽서, 열쇠고리, 주화, 사탕 같은 잡화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칼 위주로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주문해야만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음식점도 있었다. 큰아이는 사진 찍고 싶은 게 있다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사진을 찍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카페에서 들어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온몸에 퍼지는 따스함과 커피의 구수함에 종이 인형처럼 노골 노골해지는 기분이었다.
오사카성도 주유 패스를 이용해 무료 관람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의 규모는 거대했다. 들어가는 길에 철로 만든 문은 어마어마하게 튼튼해 보였다. 사람 키만큼 거대한 돌로 만든 성벽 또한 장관이었지만 침략자의 권력 과시용이라서인지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로 올라갔다. 천수각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모습도 멋있었다. 천수각 주변으로 넓은 해자가 있고 해자에는 금빛 나는 배가 다니고 있었다. 동서남북 천수각 한 바퀴 돌며 구경하고 한층 씩 내려가며 전시관 구경을 했다. 오전에 쏟아지던 비는 정오를 기점으로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배가 좀 고팠지만 1시 30분 어좌선(御座船):일본말로 고자부네 즉 임금이 타는 배라는 놀잇배를 예약했다. 편의점 옆 자동판매기가 있는 곳에서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비를 잠깐 피했다.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있어서 아이들이 동전을 모아 아이스크림 한 개 구매했는데 냉동이 잘되어 있어 굉장히 딱딱했다. 자판기에는 영하 21도라고 적혀있었다. 다른 음료자판기도 있었는데 주변 청소를 안 해서 거미줄과 까만 먼지로 뒤덮여 있어 아이스크림만 구매하고 얼른 나왔다.
놀잇배 선착장에 줄을 서서 주변을 구경했다. 해자는 커다란 돌로 빈틈없이 쌓여있었다. 그 옛날 어떻게 이런 해자를 만들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해자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을까. 노역을 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배를 타려고 기다리다 보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배 타기 좋은 날씨다. 선착장 주변에 수달 비슷한 동물이 먹이를 찾아 올라오고 있었다.
“수달인가?” 우리끼리 이야기했다.
“뉴트리아!”라고 배를 관리하는 직원이 웃으며 얘기했다. 우리말을 들은 모양이다. 선착장 밑으로 기어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뉴트리아는 집쥐의 거대 버전인데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생충과 병균을 옮기는 동물이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배를 타니 코팅된 설명서를 한 장씩 나눠 준다. 귀신을 막는 인면 석이 있다고 해서 눈을 크게 뜨고 찾았는데 성벽 위쪽으로 사람 얼굴을 닮은 돌이 조그맣게 끼어 있었다. 왠지 힘들어 보였다. 귀신을 쫓기는커녕 ‘살려주세요!’ 하는 표정이다.
곳곳에 청둥오리와 원앙, 물새 떼가 사람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모여 비에 젖은 날개를 말리느라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쉼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뱃길을 따라 헤엄치는 청둥오리의 뒷모습, 배가 오면 피하느라 물 위를 달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멀리 보이는 천수각에 비가 그치자, 까마귀 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느라 숨어 있었는지 여러 방향에서 무리 지어 날아와 천수각 위에 앉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검은 새들이 몰려와 천수각 위에 밀집해 있는 모습이 잠시 섬뜩해 보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가 잠시 생각났다.
배는 해자 수로를 따라 약 20분가량 탈 수 있었다.
물새 떼와 해자. 높이 올려다보이는 천수각이 장관이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황금물고기도 비 온 뒤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배에서 하선한 후 우메다로 이동했다. 루코아 백화점에 가서 장어덮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이게 웬일! 우리가 생각했던 곳은 대기인원이 30여 명 대기줄이 있었다. 기다리기엔 너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식당가를 뱅뱅 돌았지만, 마땅히 먹을 데가 없었다. 백화점 지하인데 선술집으로 가득 찬 포장마차촌 같은 느낌이었다. 덮밥집에 들어가서 소고기덮밥, 돼지고기 덮밥을 시켜 먹었다. 생수 대신 녹차가 나왔다. 녹차 가루를 탄 물이었는데 나름 괜찮아서 두어 컵 마셨다. 소고기 덮밥도 생고추냉이를 얹어 먹으니 맛있었다. 그리고 요도바시 카메라(쇼핑몰)에 들러 쇼핑을 했다. 신기한 주방기구들이 많이 있어서 재미있게 구경했다. 가위와 도마가 합체한 도마가위가 신기했다. 가챠(확률성 아이템 뽑기 기계) 샾도 많이 있었다. 레고와 게임기만 주로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관람차를 타기 위해 백화점을 나와서 다른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백화점들이 밀집된 도심가로 전철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사거리엔 수많은 인파들이 길을 건너고, 전철이 덜컹이며 지나고 나면 요란한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둔탁한 여러 가지의 발걸음 소리는 홍콩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헵파이브 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도심에 빨간 관람차가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 타면 야경이 멋지다는데 해가 질 무렵 타게 되었다. 흐린 날씨였지만 도심의 관람차 안에서 복잡한 시내와 건물들, 지나가는 전철들을 바라보며 서서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연히 백화점 지하에서 상업고등학교 다닐 때 연습용으로 썼던 올리베티 수동타자기를 보았다. 스미스 타자기보다 높고 깊어서 타자칠 때 손가락에 힘이 많이 들어가던 타자기였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베이글만 파는 가게가 있어 몇 개의 베이글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나른함 피곤함에 지쳐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하루였다. 이렇게 타국에서의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