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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럼 과제

by 황현경

우리 학원은 읍에 있는 미술 입시 학원이다. 원장 선생님은 나의 선생님이셨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셨고 개인전도 여러 차례 전시한 경력이 있으시다. 미술대회에서 큰상도 여러 차례 받아 유명하신 분이지만 서울의 소란함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이 왔고 고향인 이곳에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기로 하셨다. 나는 원장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입시에 성공했고 대학을 졸업했다. 앞으로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구상하던 중 원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잠시 도와드리러 내려왔다. 이곳은 경치도 좋고 조용한 읍내이다. 무엇보다 풍경이 아름다워 그림 그리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원장 선생님은 그림에서만큼은 철저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분이라 약간의 실수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분이다. 아이들은 그 부분을 많이 어려워하지만 대신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본다.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좀 잘 그리지 못한 부분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잘 따라온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우리 학원에 보내왔다.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으시지만, 아이들은 본인들이 잘하는 일들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하신다. 미술을 선택한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부모님들은 아이가 재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를 해주셔서 학원은 운영하기에 수월하다. 며칠 전 새로운 학생이 왔다. 수현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조부모님을 모시는 부모님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까칠한 성격에 별로 말이 없지만 그림 솜씨는 뛰어나다. 여름 집중 수업 기간이다. 아이들과 가까운 주천강 근처로 소풍 겸 그림 수업을 하기 위해 나가기로 했다.

“선생님 빨리 가요. 엄마가 도시락 싸주셨어요.”

막내 진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학원으로 뛰어 들어왔다. 새침한 수현은 챙 넓은 모자에 꽃무늬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작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조용히 들어왔다.

“민식이랑 정현이는 아직 안 왔니?”

“조교선생님 저희 도착했어요.”

말 끝나기 무섭게 민식과 정현이 들어왔다.

“이제 출발하자. 어서 타라.”

9인승 차를 타고 주천강으로 갔다. 강바람이 시원하고 초록색의 아름다운 나무들이 강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부는 바람에 나뭇잎을 강에 띄워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작은 이젤을 펼치고 조용히 각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현은 순식간에 스케치를 끝내고 팔레트를 들고 수채물감으로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원장 선생님은 아이들의 그림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아마 그림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마지막 정현의 그림 앞에서 한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엄지손톱을 물어뜯는다. 원장 선생님이 뭔가 못마땅한 일을 지적하기 전에 하는 버릇이다.

“정현아 이 부분은 이렇게 그리면 안 된다고 몇 번 말했었는데 아직 그 버릇을 못 버렸구나.”

정현은 고개를 수그리고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홱 돌아서 물가로 내려가 버렸다.

“이정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데 뭐 하는 거야!”

원장 선생님은 화가 나서 붉어진 얼굴로 정현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이들은 얼어붙은 얼굴로 그림 그리던 것을 멈추고 정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현은 신발도 신은 채 물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가 흘러가는 강물을 미친 듯이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는 당황하여 뛰어 내려갔다.

“정현아 왜 그러니? 진정해라.”

정현의 등을 감싸며 진정시켰다.

“생각처럼 그려지지 않아요. 부모님도 선생님들도 내게 기대하시는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니까 내가 바보같이 느껴져요. 아무래도 저는 재능이 없나 봐요.”

정현은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현을 물가로 이끌고 나와서 바위 위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현아 선생님도 그림 그리면서 그런 적이 있었어. 그림이 뜻대로 안 되고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마저 들어서 너처럼 많이 속상해했었어. 슬럼프를 당장 이겨내는 것은 어려워 힘이 들 때 잠시 쉬어가도 좋아 어떨 땐 실력이 좋아서 그림과 가까워질 때도 있지만 어떨 땐 그림과 다퉈서 실력이 안 좋은 날도 있어 그림이라는 것이 너와 함께 가는 친구라고 생각해 봐. 친구와 가끔 다툴 때도 있고 친하게 지낼 때도 있는 것처럼 미술이라는 친구를 다독여 줘 봐 그리고 너 자신도 토닥여 줘. 핸드폰도 방전되면 충전해 줘야 하잖아.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해.”

정현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배고픈데 밥 먹고 할까?”

“네! 좋아요.”

긴장되었던 아이들의 표정이 풀리면서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넓은 바위 위로 모여들었다.

얘들아 살면서 많은 일이 너희를 힘들게도 즐겁게도 하겠지. 그 당시는 많이 힘이 들어도 지나고 나면 추억의 나뭇잎처럼 예뻐 보일 거야. 그러면서 조금씩 자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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