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메리카노
후두에 염증이 생긴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를 내었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의 마음에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쇠의 질감을 닮은 소리가 꽤나 불쾌했다. 소염제를 먹어도 염증은 쉽사리 낫지 않았다. 잔기침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대로 영영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건강은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올해를 시작하면서도 지독하게 앓았었던 기억이 난다. 몇 날 며칠 계속 속을 게워내며 이 지긋지긋한 앓이가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나날들. 그때는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해를 지나며 이것저것 참 부단히도 바라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새 11월. 또다시 건강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나 자신을 보며 다소 미련함을 느낀다.
목의 염증은 낯설었고 또 낯선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 난생처음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셔보고 장롱에 걸려만 있던 스카프를 목에도 둘러봤다. 한겨울에도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던 내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란 다소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풍미가 깊어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었고 스카프는 목에 둘러보니 평소보다 덜 추워서 좋았다. 시작은 낯설었지만 그것들은 곧 자연스럽게 내 일부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언가 이유가 생기기 전에 자발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렵다는 걸 점점 느낀다. 아마도 관성적으로 행동하던 것들이 많아서 그럴 테지. 어떤 이유로든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일상을 생각보다 많이 바꾸어 놓는다. 일상은 견고하지만 작은 것들이 바뀌면 또 금세 그 결을 달리한다. 마치 목소리를 잃은 일주일 동안 나의 일상이 그러했듯이.
후두에 염증이 생긴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절기는 어느덧 입동을 지나 소설을 바라보고 있고 나는 그만큼 또 미묘하게 낡아졌다고 생각했다. 그새 새로운 습관 따위가 생겼다. 후두의 염증은 목소리를 바꾸어 놓았고 일상도 바꾸어 놓았다. 바뀐 목소리에 연연하는 사이 나는 조금쯤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적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