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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Jan 23. 2023

슬픈 다툼 2

< 다툼의 영수증 > 83년생의 집



다음 날 어머니께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셨다.



시할머니께서 천만 원을 주시기로 하셨다는 전화였다. 할머니의 돈은 아니었다. 출처는 아버님의 바로 아래 동생인 작은 아버지. 지금 시할머니께서 살고 계신 집의 보증금 중 천만 원을 후일에 작은 아버지에게 돌려주시는 조건으로 구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던 나는 조그맣게 안도했다. 한편으론 내가 어른들을 이혼으로 협박을 했던 터라, 씁쓸하기도 했다. 첫 만남 때 가족 중 유일하게 나를 환영해 주셨던 시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죄송하기도 했다.



헌데 남편이 난감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 이런 단서를 붙였다.



"작은 아버지께서 그 돈을 우리 보고 직접 받으러 오라고 하셨대..."



'시아버지께서 빚진 돈을 왜 갓 결혼 내가 친척 어른들께 고개를 조아리고 굽신하고 받아와야 하는가?' 다시 한번 몹시도 화가 났지만, 이 끔찍한 상황을 수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게 어딘가 싶었다.



또 한 가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산을 사업을 이유로 다 써버리실 동안 작은 아버지와 여동생인 고모님이 그러라고 동의하셨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 또 형이 금융 사고를 쳐서 조카들에게 천만 원을 빌려주게 되셨으니 작은 아버지도 속상할 거라는 생각으로, 동병상련일 거란 마음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 댁인 부천으로 가는 전철에서 말없이 멍하게 기대어 있었던 장면이 생각난다. 더이상 두 손 꼭 잡으면서 으쌰으쌰 할 힘도 없었다. 간신히 낯선 동네 낯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작은 아버지 내외께서 맞아 주셨다. 남편을 보고는 반가워하시면서도 나를 보는 눈빛은 탐탁지 않으신 게 느껴졌다. 왜일까. 이유가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뵌 게 다 였던 친척 어른들과 나의 사이에는 이미 오해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날 그 사실을 양쪽이 함께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결혼하기 직전에 시아버지의 동생들인 작은 아버지와 고모님께서 꽃님이 꽃돌이네 월세 구하는데 보태라고 시아버지께 축의금 말고 1000만 원을 모아서 주셨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받은 일이 없었다. 작은 아버지 내외를 대면하고 앉아서 처음 들은 얘기.



돈을 받은 적이 없으니 우리가 작은아버지와 고모님께


"주신 돈으로 월세 구하는 데 잘 보탰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전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하루, 어머니께서 작은 어머니와 고모님이 우리 원룸 신혼집을 구경하러 오시고 싶어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빨리 조카의 신혼집을이 궁금하시다고?'



조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시구나, 하기엔 부족함이 없으신 어르신들의 형편에 비해 축의금이 친한 친구들이 주는 정도셔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찍혔었다. 집까지 보셔야할 정도로 아끼시는 것과 축의금 사이의 갭.



"어머니, 원룸이라 집도 좁고 2인용 식탁이라 어른들 식사도 드리기 힘들 것 같아요."


그날의 이상한 느낌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시댁 어른들에게 '뭐지?'하고 물음표를 가졌던 것처럼, 친척 어른들도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받고도 인사도 할 줄 모르는 되바라진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셨던 거였다. 그 돈은 그냥 아버지 수중에서 사라진 것인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이거였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저렴한 비행기 표를 잡으려다 보니 하루를 신혼집에서 고 다음 날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결혼식 끝나고 안양 집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짐을 챙기다 잠들었다. 헌데 시아버지께서는 천만 원까지 주셨던 친척들에게 다시 전화해서 꽃님이랑 꽃돌이가 하루를 한국에서 있다가 가야 하는데 호텔비가 없다고 한다고 호텔비를 달라고 하셨다는 거다. 그러니 어른들이 느끼기에 내가 얼마나 싹수가 없어 보였을지. 나는 돈이 없으면 안 가면 그만이지, 돈이 없으니 호텔비를 내놓으라고 친척들에게 요구한 조카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또 울컥해서 작은아버지 내외 앞에서 눈물이 났고... 이런저런 나의 계획과 포부가 있었는데 이런 일이 닥쳐와서 너무 무섭고 놀랐고.. 속상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작은 아버지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면서


"꽃돌이가 그래도 부인은 잘 얻었네."


한 마디를 하시고 방에 들어가서 돈이 든 봉투를 건네주시다가, 지갑을 열고 "이건 용돈 해." 하면서 용돈까지 더 얹어서 주셨다.



거의 탈진인 상태로 며칠을 보내었고, 결국 회사 생활도 해야 하는 남편의 신용도를 생각해서 친정엄마께 맡겼던 돈도 찾아서 시아버지께서 만든 빚을 갚았다.







3개 카드사의 카드론 빚을 막으면서 모든 게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지쳐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서로 얼굴 붉혔던 일을 빨리 풀어내고 싶으셨나 보다. 남편에게 전화하셔서 "서로 오해도 풀 겸 밥을 먹자."라고 하셨다.


하지만 남편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이 모든 일의 잔상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남편에게 당분간 싫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밥 먹자던 약속을 거절한 날 저녁...


  



그날은 3.1절 전 날이었는데



남편이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 사이에 아가씨에게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지 않자 카톡이 날아왔다.


"엄마 쓰러지셨어. 지금 응급실이야. 너 지금 안 오면 너 평생 안 봐."


이건 무슨 일이지??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면서 정말 울고 싶지만, 어른이 쓰러지셨는데 내가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울음을 꾹 참았다. 남편도 창밖만 보며 말이 없었다.



도착하니 어머니께서는 침상에 누워서 우리를 보시고는 말씀을 잘, 못하셨다. 'TV에서만 보던 실어증이 오신 걸까. 나 때문에?'


덜컥 겁이 났는데, 시할머니랑 시이모님께서 오시더니  나에게  "얘 너 너희 시엄마랑 싸웠니..? 왜 그랬어..."


"느이 시엄마가 얼마나 성질이 있는 사람인 줄 아니? 싸움에서 지면 분해서 잠을 못 잤어. 동네에서 알아줬다고."


시할머니와 시이모께서는 호호 웃으시면서 '(시어머님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야'를 든든하고 정겨운 뉘앙스로 내게 표현하시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나에게 왜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 덤비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 겁을 주시는 건가. (덤빈 적도 없는데요)' 싶었다.


 

게다가 아가씨는 찬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나는 죄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기분이 나빴던 말은



"니 팔자라고 생각해. 팔자인 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남의 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을 팔자라는 말로 당연하게 '그러려니 하고 살아라'라고 하시는 건가. 내 팔자를 누가 정해? 이런 미래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10년도 넘게 지나서 담담하게 써 내려가지만, 그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격랑을 두 뺨으로 맞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물론 한 다리 건너의 시이모님이시긴 하지만, 미안함이 조금도 없이 웃으면서 니 팔자라고 생각하라는 걸 보니 이대로 가면 나는 모든 게 원래 그렇다는 듯 쪼그라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게 운명이라면 탈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어른이 응급실에 누워계시니 침착하게 의사 선생님을 기다렸다. 우리가 오기 전에 다른 검사는 다 했고, 이제 가정의학과 당직 선생님이 내려오실 거라고 했다. 여자 선생님이 내려오셨다. 선생님께서는 나, 남편, 아가씨, 시할머니, 시이모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휴일(3.1절)이니 관심을 가져주시고요. 지금 바로 퇴원하세요."



관심이 필요하시다고.. 바로 나가라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남편에게 더 이상은 피가 말라서 이렇게 못 지내겠다고, 당분간 시댁과 연락 좀 안 하고 살고 싶으니 내일 어머니께 당신 혼자 가라고 말했다. 나도 침대에 누워 끙끙 앓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시댁에 남편이 도착했을 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을 구워 드시고 계시다가,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어머니께서


"아들~ 와서 고기 먹어."라고 하셨단다. 하루 만에 풀릴 실어증에 택시를 타고 정신 없이 목동까지 달려가 잠깐의 병원비로 22만원이 나갔다니.



그렇게 나는 마음을 접었다. 시댁을 안보고 살기로 결심했다.


 





이 일들을 친구들에게는 자세히 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얘기가 너무 길어서 처음부터 덥석 말하는 게 아니라 살짝 운을 띄었을 때,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지금 글을 읽는 분들이 <뭐 이런 놈의 집구석이 다 있지?>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는 것처럼. 현실에 저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릴 테니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지.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자세히 말을 할 수가 없어 어렴풋이 시댁이랑 싸웠다고 하면, 친정 부모님은 물론이고 제일 친한 다정한 친구들조차도


"꽃님아, 그래도 어른들께 할 도리는 해야지. 그래야 너도 복을 받는 거야."



하지만 나는 당장 다가오는 어버이날, 추석, 명절, 생신 어느 행사로도 그분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이 난리의 장본인인 아버님은 내가 당시에 느낄 때는 혼자 속 편하게 제주도에 있는 친구네 귤 농장으로 떠나버리셨다.



너무 답답해서 어디다 하소연해야 할까 하다가 당시에 미즈넷이란 곳에 (내가 거기에 글을 올리게 될 줄이야) 글을 올려보았는데,

내공 만렙의 선배들이 아버지의 유형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달아주었다. 남편과 내가 이혼을 해야 하냐 마냐 (이건 묻지 않은 건데)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서 (남편의 행동에 따라서 /애정에 따라서) 등으로 분석하며 이런저런 댓글들을 달아주었다. 근데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함께 욕해준 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그중에 내가 '자작 소설'을 썼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 흥분된 마음에 자작이 아니라고 영수증 사진을 찍어서 잠깐 올렸었는데 그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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