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나와 친구들 사이에는 '결혼 이란 것은 최소한 아파트 전세에서는 시작해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공동의 믿음이 있었다. 물론 남자가 마련한다는 관습적인 생각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방 한 칸 월세부터 시작해 보겠다는 선택은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치기 어린 나의 마음은 양쪽 어른들이 기특해 하시며 무한한 지지를 보내주시겠지 하며 우쭐해 있었는데 돈에 얽힌 현실은 너무 매몰찼다. 가족과 가족을 갈라 놓았고, 순수한 열정은 너무 순식간에 '파혼 해야하나?'하는 생각에 휩싸이며 한 없이 초라해졌다.
그렇게 결혼하고 행복했던 3개월, 시댁과의 일로 공포에 떨었던 3개월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안으로 숨기고 옅은 웃음과 불안한 즐거움으로 살았던 대략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오피스텔에서 보냈다. 아버님의 빚과 학자금 대출들을 갚고 나니 월세 60만원 짜리 오피스텔에 머무는 하루 하루가 불안해 이제 정말 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저렴한 월세 혹은 전셋집을 찾아야 했다.
목표물 발견
서울, 독산동 전세 5천만 원 (2012,13년 당시)
만약 이 집을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던 1년 전에 보았다면
"별로에요, 다른 곳 보여주세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서울 하늘 아래 5천만 원짜리 전셋집이 있다니. 게다가 해가 잘 드는 2층이잖아, 행운이야.'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했던 걸까? 이 글에 대한 문의 댓글이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했다. 초조해졌다. 이 집을 놓치면 또 이런 저렴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덮쳐왔다.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긴급히 소식을 전하고 글 주인인 현 세입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저녁 시간에 방문하기로 했다.
남편의 회사도 안양에서 보다 가까웠다. 역에서 남편을 만나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니 구립 도서관 정류장이 보였다. 그곳에 내리니 현재 살고 있는 세입자인 아기 엄마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기 엄마를 따라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고 있는 주택가가 나타났다. 붉은 벽돌 집들이 어둠 속에서 명암을 드리우며 다양한 지붕 아래에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바로 옆에 환한 구립 도서관 건물이 있어서인지, 무섭지가 않았다.
다가구 주택의 철문을 통과해 아기 엄마를 따라 계단을 총총 올라갈 때, 엄청 떨렸다.
'이 집이 마음에 들어야만 한다.'
'반드시 마음에 들어야 해.'
'전세 5천짜리는 흔치 않아. 여기 살아야 해.'
내 마음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면, 뒷덜미를 잡아다가 이 집에 욱여넣을 기세로,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보인 풍경
현관에 서서 보았을 때, 바로 오른쪽에 있는 흰 문이 화장실. 갈색 마루를 복도라고 한다면 복도 오른쪽에 싱크대가 있고 왼쪽에 방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가장 먼저 본 곳은 화장실.
가장 먼저 열어 본 화장실
의식한 건 아닌데, 화장실이 현관 바로 옆에서 화장실부터 열어보았다. 빨강은... 아니고 보라색도 아닌 것 같은 묘하고도 강렬한 자줏빛 색감의 변기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앗! 낯설다.'
나의 뇌가 무언가를 판단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얼른 다른 판단을 입력했다.
'음. 화장실이 세모는 아니군.'
이것은 순수한 사실. 이 화장실은 네모다. (1년 전에 보았던, 꼭짓점 부분에 변기가 있던 세모 화장실과는 다르다.)
그리고 싱크대가 보였다.
'허어... 흐읍...'
당황한 나를 향해 아기 엄마가 말했다.
"지금, 청약이 된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어서 안 치워서 그래요."
"아... 네..."
'6개월 된 아기를 키우면서 두 집을 오가고 있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겠어. 집이 엉망일만도 하지.'
몸을 돌려서 방 두 개로 가기 위한 복도에 섰다.
이곳이 씽크대 옆 냉장고가 이어지는 복도다.
복도를 기준으로 왼쪽에 큰 방, 정면에 작은 방이 있었다.
그랬다. 과연 큰 방은 크고, 작은 방은 작았다. 작은 방은 작은 게 맞으니 다행이고, 큰 방이 작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싱크대와 화장실의 생소함을 덮을 긍정이 필요했다.
"큰 방이 정말 크네... 그렇지 오빠...?"
그러고 보니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건 큰 방은 정말 크다는 거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살았던 집들의 큰 방들은 크기가 다 제각각일 텐데, 각각 그 집 안에서 가장 큰 방이니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덕분에 '이 집, 큰 방은 참 커서 좋네.'라는 위안 한 가지는 늘 확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큰 방이 작게 나온 집을 만난 적은 없었다. 행운인 걸까.
남편은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엔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골목길을 따라 큰길까지 걸어 내려갔는데, 내려가며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본인은 어디서 살아도 상관이 없고 다만 좋은 집에 살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니 전적으로 꽃님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 곳에서 살면 된다고. 다 따르겠다고. 방금 본 집이 네가 마음에 든다면 나도 마음에 들고, 네가 힘들 것 같으면 나도 원치 않는다고.
남편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용기를 내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도서관이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는 것과 구민 운동장, 산의 둘레길 입구가 5분 거리에 모두 있다는 것. 집은 너무 작지만, 이 집의 정원에 도서관과 운동장, 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전에 계약금을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혹독한 겨울의 셀프 페인팅이 시작되었다. (입주하기도 전에 보일러가 동파되는 사건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