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다툼 1
<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 83년생의 집
-이전 글에 이어서-
당장 와보라는 시어머니의 전화에 빠르게 달려갔다. 밤새 못 자고,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기력이 없었지만 막연히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한 것보단 직접 대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혼 전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곳이 시댁이 아닌 '시할머니 댁'이었기 때문에 시댁 방문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마중 나온 남편을 따라 걸어가며 말했다.
"말씀드렸어...? 그 돈 우리한테 갚으라고 계속 그러시면 내가 이혼하겠다고 한다고 말씀드렸어?"
"응... 그렇게 말했어. 꽃님아, 미안해..."
"아냐, 오빠 잘못도 아닌데. 가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자꾸 그러시면 이혼할 거예요.' 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협박은... 어릴 때 다툼이 잦던 삼촌 부부가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앞에서 하던 공갈이 아니었던가. 어린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하게 되다니.
'그래도 내가 살고 봐야겠다. 설마 돈 3천만 원 때문에 결혼한 지 3개월 밖에 안된 아들을 이혼하게 만들지는 않으시겠지. 친척들에게라도, 어떻게라도 방법을 찾으시겠지.' 이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의 협박이 통하길 바라며 두 손을 꼭 잡고 미니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었을 때 너무 어두운 느낌에 흠칫 놀랐던 것 같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작은 집이 짐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집에 비해 너무나 큰 TV, 방문을 가로막듯 놓여 있던 소파,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강아지 두 마리. 시부모님께서 첫 만남을 본인 집이 아닌 시할머니의 집에서 하자고 하셨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에 남편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시할아버지께서 열심히 일구어 갖게 된 서울 한강 근처의 중소형 빌딩. 매달 월세가 수천만 원이어서 동네에서 유지 소리 들으며 살았다고 했다. 삼대가 같이 살았기에 남편은 부족함 없이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본격적으로 본인 사업을 하시면서 월세 수 천의 빌딩도 날아가고, 아파트도 날아가버려 남편이 군에서 제대했을 때 돌아갈 집이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최근에 한번 더 월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어차피 내가 같이 살 사람은 시부모님이 아니니까.' 하며 남 얘기 듣듯이 들었는데, 막상 시부모님이 계신 세상에 발을 쑥 넣어 딛게 되니 우리 모두의 관계성이 실감이 나며 두려운 마음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나는 겁을 잔뜩 먹고 말았다. 하지만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서는 마음을 다시 단단히 잡았다.
시아버지는 안 계셨고, 시어머니와 아가씨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또 머릿속에서 딴생각이 들었다.
'돈을 쓰고 연체시킨 건 아버지인데 왜 내가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아, 거절하러 왔으니까. 나는 거절하러 와서 무릎을 꿇었다 치지만, 어머니는 왜 당연하게 마주 앉아서 화난 표정을 지으시지?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얘기는 들었을 거다. 지금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너희가 대출받아서 해결을 해. 내가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꼭 갚을 게."
"죄송합니다...... "
"싫다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머니는 이제 정말 화가 나셨다.
너, 내가 독한 말 좀 해야겠다. 니 사랑은 그깟 돈 얼마도 안되니? 너 곰인 줄 알았는데 여우였구나? 그동안 연기한 거니? 아니 개까지 짖어대고 난리야.
(그리고 돈에 대해서 하셨던 다른 말씀들은 이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지어내고 싶지 않다.)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듯 어머니께서도 돈에 대해 같은 말씀을 반복하셔서 결국엔 이 말을 드리고야 말았다.
"어머니, 저희 지금 원룸 월세 살잖아요. 다른 친구들 결혼할 때 최소한 전셋집에서는 시작하는데. 저희는 집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지만 열심히 살아보자고 결혼 한지 겨우 세 달이에요. 나중에 아이도 낳으려면 대출 더 받아서 전세로 가야 하는데, 대출을 받아서 아버지 빚을 갚으라고 하시면 저희는 어떻게 살아요. 주저앉으라는 말씀이세요.... 미래가 안 보이잖아요. 저는 못해요. 이혼하겠습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내 입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전화를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들을라고 큰 소리로
"할머니, 이혼한데. 하, 진짜 이혼시킬까?"
아가씨의 저 한 마디가 나를 벌떡 일어서게 했다. 정말로 기가 막혔다.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지??
"가보겠습니다."
차분하게 가방을 챙겨서 나가는 데 갑자기 뒤에서 어머니가 남편에게 소리치셨다.
"꽃돌아 어깨 펴!!!! 너 내가 그렇게 안 키웠어. 쟤한테 기죽지 마!! 어깨 피고 가!!!"
(아들 어깨가 굽은 건 저 때문이 아니에요....)
어머니 눈에는 침착한 표정으로 눈하나 깜빡 않고 '죄송합니다.'만 하는 내가 표독스러워 보였던 걸까. 계단을 걸어 내려와 이면 도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편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꺽꺽 거리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정말 너무 무서웠다. 나를 향해 짖어대는 사나운 강아지 둘과 어머니가 나에게 쏟아내신 말들, 아가씨의 빈정거림...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히고, 무서웠다.
그리고 너무 불리했다. 명의가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현재 연체 상태이며 그대로 두면 더 심각한 상황이 되는 건 그저 우리였다. 급한 건 우리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