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남편과 아이 둘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데 반짝이는 영화관이 보였다. 연년생의 부모로 산지 어느덧 8년. 부부가 함께하는 심야 영화 관람은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겨야만 가능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남편도 같은 곳을 보았는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닥거렸다.
"심야 영화 보고 싶다.... 우리 안양 살 때 참 좋았는데."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첫째가 낚아챘다.
"아빠, 뭐라고~? 안양이 어디야?"
분명 동생이랑 큰 소리로 떠들며 딴짓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들었지!
"그땐 너희가 엄마 뱃속에도 없을 때야. 엄마 아빠 둘이서 데이트하고 그랬다~?"
보증금 1000/ 월세 60 관리비 별도.
그때에는 너무 비싼 월세라 마음을 졸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돌이켜보니 '안양 살 때 참 좋았는데.'라고 추억할 수 있는 고마운 지점이 되었다. 처음 3개월은 아주 행복했고 곧 무서운 일이 일어났지만.
창 쪽에 열려 있는 문은 방문이 아니라 보일러실 문
함께 단촐한 식사를 했던 남향 창가
오피스텔은 풀옵션으로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에어컨이 구비되어 있어서 우리의 살림 1호는 청소기가 되었다. 튼튼한 청소기라길래 샀던 빨간 밀레 청소기는... 정말 고장이 안나도 너무 안 나서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고마운 청소기는 우리가 이사를 다닐 때마다 전 사람이 이사 나간 혼돈의 빈 집에 선발대로 투입되어 뒷일을 도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사 갈 집에 화재 진압용 소화기처럼 한 손에 덜렁 청소기부터 들고 들어갔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현재의 청소기> 이제 노병이 되었지만 기능은 쌩쌩하다.
버스로 마트를 오가며 간단한 살림살이로 집을 꾸미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안양 CGV와 10분 거리에 있는 안양역 롯데 시네마에서 심야 영화로 건축학 개론을 보던 시절.
그리고 진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결혼 3개월 차의 그러던어느 날...'
평소에는 건물 뒷문 밖으로 나가면 바로 시작되는 안양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서 해 먹었지만 기분을 낼 땐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곤 했고, 그날도 그랬다. 남편과 팔짱을 끼고 마트를 실컷 구경하고는 카트에 담긴 몇 가지 물건들을 계산하려는데
"고객님, 카드가 안 되는데요."
남편의 주거래 카드가 안된단다. 그다음 카드도, 다음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 부모님이 재벌 2세에게 따끔한 맛을 봐라, 할 때 많이 보던?
우리 시댁은 재벌이 아닌데..
급히 내 카드를 꺼내어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남편의 낯빛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크게 당황하고 영문을 몰라하던 남편이 집에 가까워질수록 뭔가를 깨달은 듯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빠한테 전화 좀 해볼게."
"왜...? 아버님한테?"
"전에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꾸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카드사에서 전화 오면 동의 대답하라고..."
"그래서...?"
"일을 해야 하는데 카드사랑 아빠랑 자꾸 번갈아 전화를 하니까 정신도 없고. 그리고 아빠가 사업하는데 잠깐 필요하고 금방 다시 갚을 거라고 하셔서 그냥 동의했어. 정말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들어보니 그게 우리가 결혼하기 전이니까 그동안 갚고 계셨다는 거고, 지금 모든 카드가 정지될 만큼 연체가 되었다는 건 갚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셨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빠... 얼른 전화드려봐...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 월세 사는데."
남편이 집 밖으로 전화를 하러 나간 동안 시계 초침이 내 귀에 대고 흐르는 것처럼 째깍째깍 소리가 들렸다. 내 맥박 소리인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니겠지. 방법이 있으신 거겠지.
남편이 힘없이 돌아와서 말했다.
"지금 돈이 없다고 우리가 대출받아서 갚으래.."
???
"장모님... 그 돈으로 일단..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셔..."
여기서 장모님 그 돈은
첫 글에 썼다시피 우리는 결혼 자금 4천 중에 3천으로 집을 구하고 있었는데, 위풍당당하게 "나는 작은 집, 초라한 집에서도 잘 살 수 있어!"하고 집을 보러 나갔던 딸이 기가 확 꺾여서 오피스텔에서 시작하고 싶다고 하니 친정엄마가 딱했나 보다. 오피스텔 월세가 보증금 1000만 원에 60만 원이니까 남는 2천만 원을 엄마에게 맡기면, 엄마가 매달 이자로 15만 원씩을 주겠다고. 그러니까 너는 60만 원 월세가 아니라 45만 원 월세에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하시며 맡고 계신 돈이 2천만 원이었다.
아버님은 그 돈을 어떻게 생각해 내신 거지? 우리 엄마가 결혼 자금으로 주신 피, 땀 어린 돈으로 아버님 빚을 갚으라고????
그 돈으로 다 갚아지지도 않는다.
"다시 전화해. 우리 절대 그 돈 못 갚는다고. 아니, 내일 가서 말씀드려 우리가 돈이 어딨어."
하지만 남편은 단호한 눈으로 알겠다고 약속하고도, 연결음 끝에 아버님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저 "네, 네..."라고만 했다. 그렇게 결론은 "네!"인 걸로 자꾸 대화가 끝나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럽고 능수능란했고 어린 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굉장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이셔서 남편의 반응이 그야말로 자동로봇 같은 것도 내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부분이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처럼 혈압이 오르면서 "오빠는 오빠가 잘못했냐, 왜 네~ 밖에 말을 못 하냐!" 외치며 손에 잡히는 물건을 바닥에 내던지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결혼 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
지하철 첫 차가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동이 트자마자 남편을 깨워 강서구에 있는 시댁으로 가라고 떠밀었다. 남편이 떠나고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데 귀에서 삐- 소리가 나고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있는 사람에게 돈 3천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보증금 천만 원짜리 월세에 사는 돈 없는 우리에게 우리가 쓰지도 않은 돈 3천만 원을 갚으라는 건 청천벽력이었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셨다.
"얘. 너 이리 좀 와야겠다. 와서 얘기 좀 하자."
평생 또래보다 어른들한테 더 이쁨을 받았던 모범생. 예의 바르다, 깍듯하다, 인사성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살았지 어른과 얼굴을 붉혀본 적이 없는 나는 화가 난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코트를 챙겨 입고 시댁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