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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Jan 15. 2023

화장실에 무릎 꿇음

< 첫번째 집, 안양 원룸 오피스텔 > 83년생의 집



"결혼은 원래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거야."



스물아홉, 결혼을 주저하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두 눈에 힘 딱 주면서 내가 했던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자뻑 때문이라는 걸 방금 깨달았다.


용감한, 돈에 연연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여자..... 가 된 듯한 기분으로 저런 말을 했을 테고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이 말을 기억하는데 이 페이지를 쓰려고 창을 열면서


"오빠, 내가 결혼하자고 설득할 때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했더니


남편:  . . .

나:  기억이 안 나?

남편: 응...


공포의 돌발 퀴즈 앞에서 이제 웬만해선 버벅거리지 않고 차분하고 솔직히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느긋했지만 동공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남편: 음..... 오빠, 빨리 시작해서 돈 모으자?  

나: 됐어.



저 말을 하면서 스스로가 멋다고 생각했다면, 어디선가 주워들었을 때 그게 멋있어 보였으니 저장해두었다가 꺼내어 썼다는 건데 짐작 가는 건 TV 드라마.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보았던 첫사랑, 아들과 딸, 서울의 달,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등등...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칸방에 사는 서민들이 등장했었고 결국엔 성공하거나 화합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의 부모님은 드라마에 과몰입한 딸이 훗날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울고 웃으며 티비를 시청하셨겠지.



그 드라마들의 코드가 어린 나랑 맞았던 건, 나의 외가에서 물려받은 정신적인 유산 '맨땅에 헤딩' 정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삼성 창립자 이병철 회장님이 정미소를 시작하셨다는 그 시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주유소를 운영하셨다. 출발은 우리 쪽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할매 심성이 고우셔서 단골도 많고 장사도 잘 되었다는데, 어느 날 이 주유소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주유소 2층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반정부 인사'였던 것이다. 영문을 몰랐으나 어쨌든 세를 준 할아버지는 감옥소에 들어가시고, 할머니는 변호사를 써서 할아버지를 구해오셨으나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 대목을 상상할 때마다 그 시대에 살아나오신 게 그저 천운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린다.) 



사 남매를 데리고 굶어 죽을 수는 없기에 북한산 초입에 손수 만든 벽돌로 어설픈 집을 지은 할아버지는 날마다 산에 올라 비료 거리를 자루에 담았고 이것을 화원에 팔아 모은 돈으로 구멍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푹푹 빠지는 낙엽에 발을 헛디뎌 구르면서'라는 부분을 말씀하실 때는 회한을 꾹꾹 담은 그 목소리가 한숨 소리 같기도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사 남매를 키우셨고, 첫 손주인 나. 구멍가게 'OO 상회'의 어린 손녀인 나는 드럼통 모양의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게 의자에 앉은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린 내가 살던 곳은 강남구 개포동이었지만 할아버지 댁에 가면 '가겟집 애'라고 불렸다. 가겟집 애인 나는 식사하는 어른들 대신 손님들에게 과자 값도 받고, 담뱃값도 받고, 과자도 몰래 하나 집어먹고 가게 밖 축대에 오줌도 몰래 싸고 그랬다. (화장실이 산 쪽에 있는데 너무 무서웠다.)  



어느 날엔 치킨집 튀김 기계를 가져다 놓고 도 튀겨서 팔고, 여름에는 바로 위에 있는 '삼원 수영장'을 방문하는 많은 손님들을 상대로 튜브, 비치볼, 삶은 계란, 음료수를 팔아 쏠쏠한 매상을 올렸다. 나는 외갓집에 놀러 가면 가겟집 애로써의 직분을 열심히 수행했다. 근처에 '새마을 연수원'이라는 커다란 철문이 있는 연수원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할머니 심부름으로 검은 봉다리에 치킨을 담아서 철문 사이로 손을 넣어 치킨을 전달하곤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분들이 독일로 떠나기 전에 연수를 받았던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친정엄마 친한 친구분의 남편이 파독 광부이셨다는 걸 들어서 관련된 책도 읽어보았던 나는 내가 치킨 봉지를 전달해 드렸던 이모, 삼촌들이 타국으로 고생하러 떠나시기 직전이었다고 생각하면 뭉클해지곤 했다.



내가 본 건 이 정도이지만 엄마의 한 맺힌 토로에 의하면 그 동네 주택들이 다 지어질 동안 할머니는 맏이인 엄마 머리에도 똬리를 놓고 무거운 국수 들통을 이게 하고 함께 팔러 돌아다니셨다고 한다. 함바집처럼 음식도 팔고 했다고. 집이라고는 화장실은 동떨어져 있고, 학교 가는 길은 멀고 먼데 호랑이가 나올 것 같고, 세수하는 마당은 등산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어린 소녀 마음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세수하는 걸 보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고. 그래서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선보고 한 달 만에 아빠와 결혼식을 올려버리는 이른바 '비극의 탄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장 관리인으로 일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 낚시 가실 때나 출퇴근용으로 타셨던 오토바이가 내 눈에는 레니게이드가 타는 오토바이처럼 보여서, 할아버지를 졸라 뒤에 타고 등에 달라붙어 동네 한 바퀴를 돌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자라면서 읽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인디언 할머니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했었다. 내 삶의 안식처였다.




결국에 맨땅에서 시작했지만 사 남매 모두 잘 키워내신 모습을 나도 보고 자라면서 두 주먹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물려받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두 분처럼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OO 부동산입니다. 손님이랑 집 보러 왔습니다!"



안양에서 집을 보기로 한 첫 날, 나의 용기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바로 무릎을 꿇었다면 이건 처음부터 '가짜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진짜 용기 말고, 몰라서 큰소리쳤을 뿐인 허풍 말이다.



잊을 수 없는 첫 집은, 어두 컴컴한 저층 상가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기억도 흐릿한데 도대체 그곳은 아파트도 아니고 빌라도 아니고, 무슨 건물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넓은 계단 2층을 걸어 올라가서 한 줄로 나란히 있는 현관 중 한 개의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손바닥 만한 신발 벗을 공간과 사람 세 명 누우면 꽉 찰 네모난 바닥, 번쩍 들어다가 금방 붙여 놓은 것 같은 어설픈 싱크대였다. 무엇보다 밑에서 담배 피우던 어른들이 쓱쓱 올라와서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담요 하나 깔고 둘러앉아 화투를 칠법한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두 번째 집은, 다가구 주택에 속해 있었는데 내부가 다른 가구들을 짓고 남은 자투리 공간에 지은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위층 계단처럼 보이는 비스듬한 경사면 천장과 그 아래 화장실.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화장실 꼭짓점 부분에 변기가 놓여 있었다. 낯선 구조, 금이 간 타일과 덕깽이들...



센척해도 여섯 살부터 스물아홉까지 쭉 편안한 아파트에 살았던 나에게, 여기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샤워하고... 신혼 로맨스를 시작한다...?는 생각은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 제일 무서운 건 그 화장실들이었다. 다른 건 도배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화장실은 왜 그렇게 많은 세월과 많은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자랑하고 있었는지.



"사장님... 정말 이런 곳밖에 없을까요? 신혼집 인데요...(살려주세요)"



모기처럼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사장님은


"아주 깔끔하고 괜찮은 곳이 있긴 한데, 월세가 쎄요."


"괜찮아요. 보여주세요!"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고 도착한 곳은 안양역과 지하도로 연결이 되어 있는 데다가 밝고, 번화가를 앞에 두고 있고, 공동현관이 층마다 있는 멋진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건물 외부도 좋았지만 현관 문을 열었을 때!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원룸이지만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남향 창문과 은은한 톤의 벽지, 마룻바닥, 그리고 무엇보다 깨끗한 화장실! 갑자기 이곳이 5성급 호텔처럼 보였다. 5성급 호텔에서 매일 산다고?! 대박...




남편에게는 전화로, 엄마에게는 귀가해서 마주 보고 앉아 고백했다.


"나 도저히, 다른 데서는 못 살겠어. 그냥 비싸도 당분간만 오피스텔에 살래. 제발."




'당분간만'이라는 말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는데,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서울을 뒤지다가 안양까지 내려와서 집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나의 시아버지께서도 무언가를 하고 계셨으니, 곧 터질 시한폭탄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는 것도 모른채 나만의 5성급 호텔에서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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