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정 부엌에 엄마와 나란히 서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한 어떤 말이 웃기면서도 괘씸했던 엄마가
"이놈의 계집애가 그냥!"
하면서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암전과 함께 번개가 번쩍 지났다.
손이 매워서 눈물이 난 건 잠깐이었고 뒤이어 지난 세월의 설움이 밀려와 무릎까지, 심장까지 차올랐다. 내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았고 얼마나 힘들게 (상처를 준 사람의 사과 없이 혼자 삭여) 극복했는데 장난처럼 머리를 때리다니. 이게 정감의 표현이라도 된다는 거야? 내 상처를 정말 모르는 거야? 엄마에게 화가 치밀었다.
"아! 아파!"
거실에서 놀고 있던 자매가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막내가 쪼르르 뛰어와 물었다.
"엄마, 괜찮아?"
아홉 살 딸은 사랑하는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나를 꽉 안아주었다. 귀여운 어깨에 고개를 떨구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러면 엄마가 무안할 텐데... 나중에 엄마한테 미안할 텐데 하면서도 엄마가 다시 미워졌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전학 온 나를 이렇게 소개하셨다.
"강남에서 전학 온 꽃님 학생입니다."
강남이 아직 덜 강남스러울 때였고, 그곳을 떠나왔음에도 강남에서 왔고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는 위세가 있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학급 회장, 전교 임원을 했고 엄마도 어머니회 임원을 하며 학교를 드나들었다. 학교 행사 명목의 공식적인 후원금도 오가던 시절이었다.
그때, 운동장 단상 아래의 전교생에게 주목받던 내 몸 이곳저곳엔 파란 멍과 붉은 피멍이 꽃 피어 있었지만 그 부분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너무 눈에 띄는 데도.
말투는 물론이고 눈빛조차 고상한 엄마의 체벌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가 가슴 찢어지는 자신의 아픔을 견디며 혹독하게 아이를 키워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도 있었고
"우와 넌 이렇게 공부해서 1등 하는구나! 약해 보이는데 너도 엄마도 대단하다."라고 감탄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들 자연스럽게 여겼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된 체벌은 사랑의 매가 아니었다.
(얌전한 딸내미였던 내가 맞기 시작한 이유는 학습지가 밀려서였다.)
미술은 화가 선생님 집에서, 글쓰기는 동화 작가에게 일대일로, 서예, 수영, 피아노에 주요 과목 과외까지. 아빠는 돈을 못 벌어오는데 엄마의 지갑은 계속해서 열렸다. 엄마의 희생이 크나큰 만큼,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슬픔과 분노는 불길처럼 솟구쳤다.
성적이 떨어질수록 내 눈동자가 방황할수록엄마는 이성을 잃었다.
30cm 자는 너무 약해 체벌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러졌다. 수평 저울을 배우기 위해 샀던 얇은 대나무 막대기는 아무리 맞아도 부러지지 않았다. 엄마가 말로 화를 내는 동안 손에 들린 막대가 멈춰 있는 게 더 무서웠다. 다시 나에게 날아들 것인가, 이 시간이 끝나기는 하는 걸까.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사람이 더울 땐 겨울 추위를 기억 못 하고 추울 땐 여름 더위를 기억 못 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엔 맞을 때 그랬다. 도구로 맞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손으로 맞으면 좋겠다 했고, 손으로 맞을 땐 손이 약하다는 걸 아는 엄마가 머리를 잡아 흔들거나 머리를 밀쳐 벽에 부딪히게 했고, 꼬집어 때리니 매로 맞는 게 낫다 했다.
하루는 엄마가 때리다 말고 내 머리를 자르겠다고 가위를 찾아왔다. 흥분한 엄마의 가위 든 손이 눈앞을 왔다갔다 했다. 공포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웃과 경비 아저씨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비명을 질렀다. 누가 올 때까지 지르려고 했다. 엄마의 눈이 커지더니 서랍으로 쿵쿵 걸어가 빨아 묶어 놓은 양말 뭉치를 꺼내 내 입에 물렸다. 그날 제일 미운 건 말리지 않고 방안에 조용히 앉아있는 남동생이었다.
같이 죽어야 한다고 옥상으로 가자며 엄마가 내 머리채를 끌고 아파트 복도까지 나갔을 때, 수치스러움과 억울함과 아픔으로 기절할 것 같은데 한 번쯤 기절도 못하는 내가 미웠다.
체벌이 끝나면 엄마는 멍든 곳에 연고를 발라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너를 때린 어미의 심정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기는 줄 아느냐.'
'그만큼 너를 사랑하는 거다.'
나는 힘 없이 체념하고 도망칠 생각을 못 하는 뉴스 속의 어린이들을 조금 안다. 아프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한 것 같아서, 내 육체의 아픔이 아무 일 없었던 듯 사라지면 엄마를 지켜주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었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아빠로 인해 불행한, 퇴로가 없어 보이는 엄마를 살려내는 사람이 나이길 바랐다.
하지만 엄마가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는 데도 점점 지쳐갔다. 사랑은 사랑이고 맞는 순간의 분노는 괴물 같은 것이니까.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내가 있었고, 기댈 곳이 없었다. 애정에 굶주리고 평안한 삶에 목이 말랐다.
붉은 꽃인가 했다. 초록 잎들 사이에 지지 못한 단풍이 남아 있었다. 붉게 맺혀 남아 있는 마음처럼 보였다.
엄마가 미운 이유는 체벌만이 아니다. 엄마는 내 소중한 친구들과 나를 비교했다. '그 애들에게도 장점이 있고, 너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가 죽어."
같은 말을 했다. 누구도 상상 못 할 교양 넘치는 입술로.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문화원을 다니며 예술 영화를 보고 철학 공부를 하던 엄마가 말이다.
점점 친구들이 미워졌다. 나는 못하는 걸 쟤는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또래 친구들이 경쟁자라기보단 '엄마가 비교할 비교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공부를 잘해도 밉고, 나보다 공부를 못해도 해맑고 행복한 친구도 미웠다. 모두가 미웠다. 한 번은 내가 주도해서 친구를 따돌렸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결국 내가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꽃님아, 왜 이렇게 사람을 미워해?"
친구가 했던 이 말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타인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아니, 살면서 다시는 저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매일 떠올리면서 점검하고 다짐했다.
고3 때는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백지 답안지를 냈다. 사회 과목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바들바들 떨며 OMR 카드에 정답을 마킹하는 친구들을 구경했다. 이 시간만큼은 점수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했다. 홀로 벗어나있다는 쾌감이 들었다. OMR 카드를 백지로 내려다가 선생님께 혼날 것 같아서 아무렇게나 마킹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렇게나 마킹하다가 한 개라도 맞으면? 0점을 맞으려 큰 결심 했는데, 일을 그르치겠다 싶었다.
일단 보이는 대로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푼 다음에 답을 비껴 썼다. 모르는 문제는 복수로 마킹했다. 단답형 문제를 읽어봤는데, 학생의 본능인지 꼭 답을 쓰고 싶었다. 한 칸씩 밀어서 썼다. 완벽한 0점 답안지로 냈다.
얼마 후, 꼬리표가 나왔는데 20점대로 찍혀 있어서 기함을 했다. 바로 과목 선생님께 달려갔다.
"주관식을 밀려 썼더라. 맞게 해 줬어. 고마워할 거 없어. 이번에 평균이 너무 낮아서 내가 사유서 쓰게 생겼거든."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갔을 땐 집에서 나와 막내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에겐 알리지 않고 (엄마가 자존심 상할까 봐) 심리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았다. 열심히 공부한 학기에 장학금을 받고 큰 광고 공모전에서 상도 여러 번 받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존감이 채워져 갔다. 상처가 생생한 이 시기에 만난 첫사랑에겐 정말 고마웠다. 무조건 예쁘다, 멋지다, 잘한다, 사랑한다 해주는 사람을 만나니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허기졌던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엄마 앞에 서면 실패한 딸이었으니,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 때, 서둘러 급하게 결혼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도망치듯 급히 한 결혼 생활의 과정도 쉽진 않았지만, 엄마와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이고 뭐고 무엇보다 남편과 정답게 단란하게 욕심 없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다. 엄마가 미운 그 힘만큼, 반대되는 추진력을 뿜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 나는 절대 결단코 아이를 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다짐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혐오하는 것이 그것이니까. 하지 않을 일이고 다짐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