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조그만 아기를 안고 '어떻게 이렇게 귀한 자식을 때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엄마가 되면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데 내 경우는 반대구나 싶었다. 가정 폭력, 아동학대는 대물림된다는 말이 정-말 이상했다. '내가 그 고통을 아니까 너에게는 주고 싶지 않아.'는 둘째치고 폭력 자체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똑같은 행동을?
그런데 첫째가 걷기 시작하고, '싫어!' '안돼!'라는 말로 의사 표현을 시작한 두 돌 무렵 끔찍한 의문의 답을 찾게 되었다. 나의 모습 속에서.
어느 하루, 첫째가 무한 반복 구간에 걸렸다.
"이거 시여!"해서 저걸 줬더니
"저거 시여!"
다시 이걸 주니까 "아니이!!!! 저거!"
"이거!"
"아니!! 저거 저거 저거 으아악!!!!!"
아이는 아주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완강하게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울고 있었다. 안아도 달래도 소용없이 한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목이 다 쉬었다. 온몸이 땀에 흥건하게 젖은 첫째가 탈진이라도 할까 봐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해 아빠 목소리를 들려줘도, 할미 목소리를 들려줘도, 좋아하는 과자를 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화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이 상황을 그만 모면하고 싶다는 감정에 휩싸이자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였다.
귀를 쟁쟁하게 찌르던 울음소리가 멈추자 오히려 무서워서 몸이 떨렸다. 적막 속에서 후련하게 아이를 때리던 내 모습이 끝없이 재생되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지?
나와의 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오은영 선생님의 설명을 기억을 더듬어 나의 말로 재구성해 보면,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감정의 컵은 수시로 채워졌다가 비워진다.이 컵에 분노의 감정이 채워지다가 가득 차면 넘치며 폭발하게 되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컵이 가득 차기 전에 하루가 끝나고 적절한 해소를 통해서 빈 컵으로 리셋이 된다.
그런데 학대를 받은 아이는, 자기가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속절없이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그 분노가 컵을 비우듯해소되질 않는다.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감정의 컵이 이미 분노로 채워져 있는 상태가 기본 값이 된 채 살아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컵에는 약간의 분노만 채워져도 바로 넘치며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그 강의를 듣고 '이거구나!' 싶었다. 특히 나는 '억울할 때' 분노가 폭발했다. 한계치까지 할만큼 노력했는데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낼 때.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을 때 폭발했다.
아기가 엄마의 젖만 바라고 한없이 매달려 있을 때를 지나 독립된 인격으로 첫번째 세상인 나에게로 돌진할 때, 감정적으로 미숙한 나는 억울함을 누르고 눌렀다. 아이를 사랑해서 갖게 되던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죄책감도 가끔은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 나도 힘든데!'라는 작은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좁은 집, 빠듯한 형편, 연년생 육아가 맞물려 돌아가니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아이의 엉덩이를 때린 날이면 자기혐오에 빠져서 더욱 괴로웠다.
그렇게 엄마를 원망했으면서, 나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니. 이렇게 작은 아이를 때렸다니.
어떻게하면 이러지 않을 수 있을까. 육아서들을 찾아 읽어보면 나와 원부모 간의 문제 해결, 그러니까 내 상처를 치료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한 번은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엄마는 나를 엄청 때렸었잖아.'라고 말을 꺼내보았다. 그러자 엄마는, 니가 그때 맞을만했으니 맞은 거다,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엄마를 탓하느냐, 엄마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았고 너를 위해 희생했는데 너는 애 엄마가 되어서도 나를 원망하느냐, 다른 집은 아이를 낳으면 철이 든다는 데 너는 그대로다. 등등의 말을 했다. 그렇게 서로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먼저 해결하라.'는 실행이 불가능한 답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방법이 없으니 그냥, 오직 나의 모성애에 의지하여 욱여넣듯 참아보기로 했다.
아이를 한 번이라도 때린 날은 뇌가 글로 적나라하게 인지하게 하려고 일기를 썼다. 글로 자세히 묘사하고, 통렬히 괴로워했는데 또 그러면 인간이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이에게 화가 날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손을 드는 대신 입술을 깨물기로 했다. 입술을 깨물고 깨물었다.
하루는 부들부들 떨다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입술에도 상처가 나면 딱지가 앉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일단은 우격다짐으로 피를 흘리며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화를 참았다. 못 참는 날엔 나무젓가락으로 식탁을 쾅쾅 두드렸다. (그것도 때리지만 않을 뿐 폭력이라고 들었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렇게 한 번, 두 번을 참고 이어서 참게 된 날엔 남편에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너는 노력하는 엄마야. 그러니까 좋은 엄마야." 하며 꼭 안고 토닥거려줬다.
때리지 않는 게 당연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렇게 수 년이 흘렀다.
아이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의지박약아'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나를 극복했다고 인정할 만한 일이 생긴 것이다. 나의 모성, 나의 의지, 나의 실천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 힘든 걸 해냈으니, 뭐든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대는 대물림된다는데, 보편적인 현상을 극복한 나는 이것만으로도 좋은 엄마의 자질이 있는거야!'라고 생각하니 정말 좋은 엄마가 된 것 같고,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더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도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내 행동을 되돌릴 수 없기에 아이에게 미안해 가슴이 쓰라리고 눈물이 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인정이 깃드니 상처가 희미해져갔다. 여유가 생기니 엄마가 걱정됐다. 엄마도 아픔이 많았을 텐데, 엄마랑 함께 할 날이 백 년도 안 되는데. 생각하니 마찰이 줄어들어갔다. 내가 변하니 엄마도 변했고, 엄마가 <금쪽같은 내 새끼>를 즐겨 시청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엄마는 이미 내 마음을 알 거야. 그걸로 됐다.'
그 생각에 확신은 없었는데, 어느 날 엄마가 스치듯 얘기했다.
"나도 후회가 되지. 그땐 이런 정보도 없었고. 내가 그때 너에게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니가 더 잘 됐을 거야."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엄마와의 관계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회복은 앞의 글들처럼 시부모님에 대한 내 마음의 회복이었다. 마음에 관한 문제들이 차근차근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나갔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적나라하고 부끄러운 모든 기록들을 여과 없이 세세히 적은 것은, 비슷한 입장의 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자기 자녀들을 죽이고자살하는 가장들의 나이대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많았고,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채무, 주식, 코인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언급되었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펑펑 울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자동차 앞유리에 남아 있는 '엄마 사랑해요'가 삐뚤빼뚤 적힌 색종이 한 장 같은 것은 잊히지가 않아 지하철에서도 울고 자다가도 울었다.
다 이해가 안되지만 막막했을 마음만은 알 것 같아서.
하지만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니까.
비슷한 처지의 우리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그리고 이 글은 특히 맞으며 자란 게 상처가 되었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적었습니다.
얼마전 '건강한 부모 소통방법'을 주제로 한 '박재연' 연구소장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소장님이 본인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대 당했던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소장님의 아버지는 기절을 해야 때리는 것을 멈추셨다고. 그런데 소장님은 훗날 대학 교수님으로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닌 <외상 후 성장, PTG>의 케이스로 소장님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밝게 오히려 공부 더 열심히하며 잘 자란 것이지요. 살펴보니, 소장님에겐 아버지 대신 사랑을 준 세 사람이있었다고 합니다. (벌써 희미해져서 학교 선생님만 기억이 납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이날 교회에서 열어주신 강연으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저는 이 상처를 극복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프고 방황했던 시간이 아쉬워요.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치유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인생에 소중한 인연을 만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닌 '외상 후 성장'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20년이 걸렸지만 성장한 것으로... 퉁! ^^
*
안녕하세요 :) 구독자님들과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어느새 브런치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요. 근황을 말씀드리자면, 남편은 여전히 착실히 일하며 대출금을 갚는 중이고 저는 아르바이트와 웹소설 쓰기(^^;;;)와 대출금 '돌려 막기'를 병행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기말고사 기간이 겹쳐서 한동안 브런치를 볼 엄두를 못냈는데, 감사하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해 주시는 구독자님이 계셨어요.ㅜㅜ 저에게 큰일이 일어나면 (예를 들어 빚 폭탄이 터진다던지), 큰일이 일어났다고 글을 올릴게요! 구불구불한 여정을 적으려고 시작한 브런치이니까 공유하기로 해요 :D
p.s 수다스런 입이 열린 김에.. 저 오늘 대형마트 대피씬을 11시간 동안 찍고 왔어요...... 마트 씬이라고 해서 '오예! 에어컨!'하며 신나서 갔는데, 정말 정말로 주차장에서만 11시간을 찍었어요. 봄 설정이라 니트 가디건을 껴입고 바닥에 앉아서 대기와 뜀박질을 반복하며 소리 실컷 지르고 왔어요. 발바닥이 얼얼, 따끈따끈. 제가 돈에 쫓기지 않았다면 11시간 동안 에어컨 없는 마트 주차장에서 땀범벅 되는 고생(=하기 힘든 경험)을 하겠습니까!
모든 것 '오히려 좋아!'로 승화하며 살아봅니다.
(하지만 마트 주차장에서 매일 카트와 주차관리 하시는 직원 분들의 처우는 반드시 꼭 개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너무나 와닿게 느꼈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