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모르는 내 동생
생일이면 생각나는 얼굴 모르는 쌍둥이 동생
나는 내가 쌍둥이었다는 사실을 중학교 때쯤 알게 됐다.
내가 먼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내가 언니가 되고 뒤늦게 나온 동생은 너무 오랫동안 엄마 뱃속에 머물러 있어서 시퍼렇게 질려서 나왔다고 했다.
술을 노곤히 추해서 들어온 아빠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 그 퍼렇게 질려서 나온 미숙아를 살려보려고 했는데.. 이미 늦었더라. " 그래서 아이를 기저귀 천에 쌓아서 4~5시간이 걸려서 묻어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나에게도 무슨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이었단 말인가?
" 4~5시간을 왜 돌아다녔는데? " 하고 묻는 나의 질문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미처 살리지 못한 네 동생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 주고 싶어서 찾아다녔지. 이곳저곳을 가봐도 아이를 묻을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묻을 수 없었다고..."
" 아빠 지금 그 산에 가면 그 위치 기억 할 것 같아? "
" 머릿속에는 아직도 선명해. 나무 밑에 햇볕이 쫙 내리쬐는 곳에 깊게 파서 묻고 야생 동물이 파헤칠까 봐 얼마나 단단히 돌로 쌓아 놓고 했는지 모르지..."
우리 엄마와 아빠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한 날 한 시에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는 고3 제일 중요한 시기에 혼자가 되었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에 미술부였던 친구 사이였던 우리 엄마와 아빠는 우리 친할머니께 친구가 대학교 갈 때까지만 같이 살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혼만 많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둘은 어느 작은 교회의 목사님 도움으로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생활을 하게 됐고... 공부를 썩 잘했던 엄마와 아빠는 동네 아이들을 과외를 해주며 근근이 먹고살게 됐다고 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고딩엄빠'라는 프로그램의 고등학생 철부지 사고뭉치 어린 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다 엄마는 임신을 했고 배가 불러와도 돈이 없어서 산부인과에 가볼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의 커다란 뱃속에 아이가 두 명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45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는 엄마는 쌍태아였던 우리는 8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조산을 하게 된다. 스무 살도 안된 부부는 백과사전을 보면서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한 명 나왔으니 출산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산통을 줄어들지 않았고 엄마가 많이 아파하자 무언가 잘 못이 됐다고 생각한 아빠가 내 동생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엄마 아빠의 기억 속에는 그날의 트라우마가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엄마는 그때부터 60살이 넘은 지금까지 가위에 눌린다고 했다. 나와 같은 해인 1980년에 태어났으니 그 아이도 나와 나이가 같을 것이다. 매일 밤 엄마 꿈속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고 원망을 한다고 했다. 아빠도 엄마도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서 문득문득 생각이 나나보다.
나는 내 생일이 오면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다. 같이 살아 있다면 같은 날에 케잌을 먹고 같이 선물을 받았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고 내가 혼자 남겨졌을 때 그때 내 동생과 같이 있었다면 더 의지가 됐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기에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일은 내 생일이다. 아빠에게로부터 원래는 내가 쌍둥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이후 나는 내 생일이 그리 신나지만은 않았다. 내가 잘 못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만 살아남은 것 같아서 미안해지는 느낌이 있다.
어른들 말을 듣지 않고 우정으로 의리로 친구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무서울까 봐 같이 살았던 시작이 결국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아픔이 생겼다.
HAPPY BIRTHDAY TO YOU TOO!!
이미지 출처: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