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뚫고 하이킥!
첫사랑에 빠지면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고?
쩝쩝대고 혼자 먹는 소리만 들리던데...?
하루종일 이어진 봉사 활동을 끝내고 배가 고팠던 터라 눈에 보이는 제일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갔다. 철판볶음밥 집이었다. 같은 학번 같은 전공 새내기이지만 그 남자는 우리와 아주 달랐다. 그 남자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마 우리 과엔 없었다. 대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다는 거 외에는...
나이도 5살이나 차이나고 공통점이 없어 보이던 그 남자랑 밥을 먹는 것이 어색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말없이 숟가락만 움직이며 먹는 시간도 어쩐지 썰렁 그 자체였다.
"오빠는 학교를 세 번 옮기셨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응"
"그럼 편입이 아니라 새로 대입을 계속 도전하신 거예요?"
"응"
내가 하는 질문에 자꾸 단답을 하는 이 사람과의 밥 한 끼는 왠지 체할 것 같았지만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처지라 대충 빨리 먹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남자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혹시 시간 되면 영품문고에 같이 가줄 수 있어?"
"네? 서점요? 왜요?"
"아는 동생한테 줄 선물을 골라야 하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 같은 여자니까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 알 것 같아서. 바쁘면 괜찮고..."
그러면서 먼저 일어나 우리가 먹은 음식을 자기가 계산을 했다. 도와 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부탁도 참 애매했다. 여동생이던 여사친이던 밥을 얻어먹게 된 꼴이 되어버려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밥 안 사주셔도 되는데. 밥값 대신 취향이 비슷할 진 모르지만 골라 드릴게요."
스마트폰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시대도 아니지만 요즘 뜨는 책이 [광수생각]이라는 것은 알기에 얼른 광수생각 책을 골라주고 집에 가야지 하고 따라나섰다. 들어가자마자 마치 그 책을 사러 온 사람처럼 한 참 베스트셀러였던 광수생각이 있는 쌓여있는 곳으로 갔다.
"이 책이 요즘 유명하데요. 만화로 그린 건데 만화가 짧고 감동적이고 그렇다네요."
남자는 별 대꾸 없이 광수생각 책을 집어 들고 걸어간다. 계산대로 향하나 했더니 CD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뭐야. 갑자기 CD는.. 집에 빨리 가고 싶다.'
지루한 듯 서성대는 내 뒤통수에 그 남자가 물어왔다.
"이문세요? 우리 엄마가 좋아 가수긴 한데.."
"이문세 몰라?"
"이문세 알죠. 이문세 별밤 들으며 공부하던 세대인데..."
남자는 이문세 CD 두장이 한꺼번에 묶인 이문세 스페셜 앨범까지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뭐야. 요즘 애들 이문세 보다 전람회나 이런 애들 좋아할 것 같은데.. 어차피 자기 맘대로 살 거면서 왜 데리고 온 거야.'
어쨌든 볼 일은 드디어 끝이 나고 222번 버스를 탔다. 나는 종점까지 가고 그 남자는 중간에 내려야 하니 아직 어색함과 완전히 볼일이 끝나진 않았지만 밥 값은 했다는 안도감에 나는 버스의 창 밖만 내다보았다. 나보다 세 정거장 먼저 먼저 내려야 한다는 말을 했기에 그 사람이 내릴 정거장이 다가오면서 인사를 했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말없이 내리던 그 남자는 영품문고 쇼핑백을 앉아있는 내게 두고 내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그 남자의 행동에 나는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쿨하게 걸어갔다. 핸드폰에서 같은 학번 동기들 전화번호 속에서 그 남자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오빠. 이거 왜 나를 주고 내려요?"
"어. 그냥 너 가져."
"왜요?
".... 뚜뚜뚜"
그날 저녁 나는 광수생각과 이문세 CD를 자취방에 가져와서 버리지도 읽지도 못하고 책상에 두었다.
'뭐지? 왜 나를 준거지? 선물할 생각이 없어진 건가? 아님 나한테 플러팅을 하는 건가?'
그러기엔 그 남자의 표정과 행동은 무지 진지했다. 왜 준건지 계속 그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그냥 읽어. 그냥 듣고'
'제가 안 읽고 안 듣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내일 학교에서 보자...'
자취방에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 광수생각과 이문세 CD는 그렇게 무료함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그 남자는 전공 수업만 들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별 말도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광수생각 책과 이문세 CD가 눈에 들어왔다.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남자에게 혼자 관심 아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학번 남자아이들보다 속이 깊어 보이고 입이 무거워 보이는 차분한 그 사람에게 계속 시선이 갔다. 어느새 시선은 설렘으로 변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도 우리 사이의 진척은 없었다. 진척을 기다리다 몸이 베베 꼬여서 죽기 전에 나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보기로 결심하고 그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나 좋아해요? 난, 오빠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문자에도 한 참 동안이나 답이 없었다. 문자를 읽긴 한 건가? 나는 전화를 걸었다.
"오빠, 좋아한다고요."
"난 너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남자의 예상 밖의 말에 나는 얼른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 왜 책이나 선물을 주고 난리냐며 한 방에 까인 처참하고 쪽팔린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 뒤로 2일은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기에. 그렇게 호기롭게 내가 먼저 고백한 첫사랑의 기억은 달콤함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불을 뚫고 하이킥을 날릴 정도로 창피했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틀 동안 학교에 가지 않자 그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받았다.
"너 여대 앞에 햄버거 가게로 나올 수 있어?"
"아니요. 전 지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거기서 기다릴게...(뚜뚜뚜)"
또 먼저 끊었다. 화도 나고 오기도 생겼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여대 앞 햄버거 가게로 갔다. 먼저 와있었는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창피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맞은편에 앉았다.
"햄버거 먹을래?"
"아니요. 전 햄버거 싫어해요"
딱 한 번만 질문하고 남자는 일어서서 햄버거 한 세트를 주문해서 혼자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억울하고 창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 말없으시면 저 먼저 가볼게요."
그렇게 나는 그 남자를 두고 몇 정거장을 걸어왔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 남자가 나를 잡지 않아서 나는 그냥 울면서 집에 걸어와야만 했다. 더 이해가 안 됐다. 할 말도 없으면서 햄버거 집에 불러내서 자기 혼자 햄버거 먹는 거 보여주는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 상식과 데이터엔 정보가 없어서 신선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충격적이었다. 못 이기는 척 햄버거 집으로 나갔지만 혹시 내 고백을 받아 주는 것은 아닌지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아닐지 기대했었던 것 같았던 내가 바보 같았다.
그 후 그렇지 않아도 싫어했던 햄버거는 쳐다도 보기 싫었다. 첫사랑에게 고백하고 까이고 미련이 남아서 나간 자리에서 그놈이 혼자 처묵처묵 했던 그 햄버거는 내 흑역사 같은 존재였다. 아직도 그 햄버거를 보면 그 남자가 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해 안 되는 건 그놈과 나는 지금 같이 사는 사이가 됐다.
"그때 왜 햄버거 집으로 나를 부른거였어?"
여전히 말수가 없는 남편은 25년 전 이야기를 들먹이는 나를 피해 달아난다. 그래도 계속 대답할 것을 조르니 개미 미 목소리로 말한다.
"한 번 더 보려고 불렀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혼자 먹을 생각을 했어.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쳐묵쳐묵?? 그리고 왜 그냥 보냈어? 왜 안 잡았는데?"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일관된 대답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남편의 마음이다.
25년 전 아무것도 따질 줄 몰랐던 순수한 나를 알고 있는 남편이 곁에 있어서 좋다. 그래도 여전히 햄버거는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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