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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15. 2024

술꾼들의 모국어

서재 털기 2번 –권여선 지음, 한겨레엔 펴냄, 2024-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년 초부터 가야지, 가야지, 결심만 하다가 드디어 병원을 다녀왔다. 검진 전 일주일간 금주에, 과자와 초콜릿을 줄이고 치킨까지 끊었다. 혈당과 간 결절 때문에 추적 검사를 해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노력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 만은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      


 검사 당일, 아침을 굶고 병원에 갔다. 혈압부터 측정하고 키와 몸무게를 쟀다. 점점 높아지는 혈압, 조금씩 줄어드는 키, 사정없이 늘어나는 몸무게를 확인하고 앗, 그다음은 얘기하지 않겠다. 미루던 일을 완수했다는 후련함을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일주일간 식단 관리를 통해 술꾼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새록새록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맥주를 마시면서 어찌나 기쁘던지… 열심히 운동해서 오래오래 알코올을 해독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하하하. 주 3회 이상 운동장 걷기 유지 중입니다).

     

 나의 시 선생님은 ‘주력(酒力)은 곧 필력’이라고 하셨다. 정상(正常)에서 조금 빗나간 상태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시가 잘 써진다고 했는데 나는 주력만큼 필력이 따라오진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에 부합하는 작가 권여선이 최근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산문집을 냈기에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나는 ‘안녕 주정뱅이’라는 책으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몇 구절 기억날 정도로 필력이 뛰어난 작가다. 상대에게 줄 게 없어서 오히려 온전히 받아주는 영경과 수환의 애절한 봄밤, 곧 이혼할 부부와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의 이야기 삼인행,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모,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카메라… 이외에도 세 편의 단편이 더 실린 책이었다. 결핍과 상처, 그 고통 속을 헤집고 다니는 불안과 이해의 표정들.  

   

 여하튼 이 소설엔 술 마시는 장면이 아주 많이 나온다. 이 소설로 주변의 충고를 받게 되었다는 작가는 이후 술이 나오지 않는 소설을 쓰기로, 술꾼으로선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으며 모국어를 잃은 심정으로 괴로웠다고… 그러다 음식에 관한 산문을 쓸 기회가 생겨서 모든 음식을 안주로 바꿔버리는 신공을 보인 것이 ‘술꾼들의 모국어’다. 소설과 달리 편안하고 아기자기하며 유쾌한 작가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글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편식이 심했던 그는 라일락이 핀 어느 봄날 소주와 함께 먹은 순대를 시작으로 닭과 돼지의 각종 부위, 삭힌 홍어까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소주와 먹으면 평소 거북했던 음식이 꿀맛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에 도전했다.      


  분식집에서 술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날 선배들이 멋져 보였다는 그의 고백과 해장에 좋은 누룽지와 명란달걀찜 소개 부분을 읽을 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글 속의 작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였다.  

    

 더욱이 그는 음식 솜씨도 꽤 좋은 편이었는데 냉잔치 국수를 만드는 레시피를 읽을 땐 능숙한 손놀림이 보이고, 양념장에 넣을 파 마늘 땡초 다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제철 음식, 재료 손질법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는 미리미리 안주를 마련해 두는 모범적인 생활 자세까지 갖추었다. 존경심이 피어오르는 찰나 쌀쌀해지는 가을에 어울리는 요리로 무 넣은 갈치조림 이야기가 나왔다. 냄비 바닥에 다디단 가을무를 깔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갈치 얹고, 양념장 뿌리고… 아. 아. 당장 시장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이렇듯 ‘술꾼들의 모국어’에는 다양한 음식을 섭렵하게 된 추억과 먹는다는 행위와 요리에 관한 그의 인식이 깜찍 발랄한 어투로 서술되어 있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이 책은 행복한 일상을 깨닫게 해주는 특효약 같다. 누군가 맛있는 음식이 주는 기쁨을 알고 싶다면, 술안주로 어떤 음식이 좋을까 고민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아래는 바람이가 고른 멋진 문장 둘이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서랍처럼, 남루한 후회가 쌓여 있고 부서진 계획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어둠침침한 우울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던 시기. 머릿속이든 몸속이든 일단 말끔히 비우고 싶어 충동적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61p      


 가죽은 정말 오묘한 맛과 향을 내는데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무와 쇠와 흙의 맛이 골고루 나서 나는 그것을 ‘목금토’의 맛이라고 부른다. 밀폐된 용기에 꽁꽁 넣어둔 가죽장아찌는 여름에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찬밥을 보리차에 말아 밥 한술에 가죽장아찌 한 오라기씩 얹어 먹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힌다. 116~117p     


 더 소개하려니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서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추신>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랜만에 자작시 한 수 올립니다.         

       

익어간다     


                바람          


헤어지네 마네 다신 안 먹겠다

각서까지 받아내는

술 때문에 다퉜던 실랑이 지나

새벽녘 푸푸― 숨소리면 충분해진 나날     


막걸리 직접 만들겠다는

호언장담과 고두밥 누룩 물 시간 비벼 넣고

폭폭, 일정한 리듬의 기포

사방으로 터질 때까지      


며칠 밤 장독에 귀

박아놓고 기다리다 마침내

삼베 주머니 조몰락조몰락

술 뜨며 달뜬 너와 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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