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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13. 2024

꿈이었다

오늘의 선물 넷



 행정복지센터의 한 공간을 빌려 매달 만남을 가지는 모임이 있었다. 나는 열혈 멤버로 활동 중이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조금 이른 시각 도착했다. 나보다 빨리 온 몇몇 구성원이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오른쪽 사람을 향해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찌 지냈냐,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때 갑자기 왼쪽 사람이 말했다. “저기요. 저 물 좀 가져다주세요.” “아, 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복도에 설치된 정수기로 향했다. 평소 모임 시작 전에 마실 물과 다과를 챙겨 왔던 나는 주전자에 물을 담고 컵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슬금슬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물을 요청한 사람의 말투가 부탁이 아닌 명령, 혹은 비난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수다나 떨고 있냐’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회의실로 돌아가 물을 나눠주었다. 물을 주고 나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 밖으로 나왔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정시에 맞춰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후 자리에 앉아 이 상황에 대해 말을 할까 어쩔까 고민했다.


 나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어쩌지? 아니야. 할 말은 해야지,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가 음료를 준비해 왔지만, 음료 준비를 당연히 저의 업무로 생각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좀 전에 한 분이 제게 왜 물을 챙겨 놓지 않았냐는 투로 말해서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제가 아니라 여기에 계시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회의실이 술렁거렸고 언니뻘 되는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바람씨가 좀 해주면 될 일을,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굳이 이야기해야겠어요?”     


 순간 빡쳐버린 나는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모두인데 왜 제게 그런 요구를 하시나요?”했다.


 기분은 더 엉망이 되었다. 이런 반응이라면 차라리 말을 꺼내지나 말 걸. 그러나 예전 같으면 입도 뻥긋 못했을 텐데, 하며 속으로 ‘잘했어, 잘했어’ 마음을 달랬다.     


 그때 어떤 사람이 중재랍시고 끼어들었다. “아까 여기 그분, 집에 가셨는데 두 분도 이제 그만하시죠.”


 집에 갔다고? 헐……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물을 달라고 했던 그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한 건데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뒷담화나 한 꼴이 되어버렸다. 얼굴을 식별하지 못해 곤란을 겪은 적은 많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오오! 나의 고질병인 안면인식장애여.     


 “저는 당연히 아까 그분이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바람씨가 물을 나눠준 후에 잠시 밖에 나갔을 때 전화를 받더니 가버렸습니다.”     


 나의 변명 아닌 변명에 그렇게 제삼자가 나서며 상황은 종료됐다.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있나. 심히 개탄하는 순간 눈이 떠졌다.           


 세상에, 꿈이었다!!          


 고민하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이 모두가 꿈이었다니. 허무하고 씁쓸했다. 화내고 망설이고 주장하고 자책한 그 모든 상황이 꿈이라니.         

  

 뭔가 억울하다고 느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지금의 삶도 혹시 이런 꿈은 아닐까. 알고 보면 평생 액자 꿈에 갇혀서 실체를 마주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정말 그런 건 아닐까.           


  황당한 생각 끝에 국어 시간에 배웠던 구운몽이 떠올라 혹시나 하며 책장을 뒤적였다. 나는 금세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구운몽을 찾을 수 있었다(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민음사 펴냄, 2013, 명석 구입).     

 

 구운몽은 승려 성진이 스승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마주친 팔선녀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진은 들끓는 욕망에 괴로워하다 사망에 이르양소유라는 신동으로 환생한다. 는 지학(志學)의 나이에 비할 바 없는 문무를 겸비하게 되어 과거 길에 오르는데, 과거는 뒷전이고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      


 소설 속 남녀는 주로 시를 지어 연정을 표현하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만남을 약속한다. 향단이와 방자 같은 뚜쟁이들의 역할이 상당했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여인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양소유가 카사노바가 아닐까 의혹을 가질 즈음 그는 떡하니 장원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간다. 공을 세우고 승진하는데 거침이 없고 어려움이 닥치면 여인들이 귀인으로 나타나 앞다퉈 그를 구한다.    

 

 세상에 뭐 이런 풍운아가 다 있담? 그는 아름답고 능력 있고 적극적인 여성들에 둘러싸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성진과 스승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대사가 소리하여 묻기를,

 “성진아 인간 세상 부귀를 겪으니 과연 어떠하더뇨?”   

  

 성진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

 “성진이 이미 깨달았나이다. 제자가 불초하여 마음을 잘못 먹어 죄를 지으니 마땅히 인간 세상에서 윤회할 것이거늘 사부께서 자비로우시어 하룻밤 꿈으로 제자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니 사부의 은혜는 천만 겁이라도 갚기 어렵도소이다.”     


 대사가 말하되,

 “네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으니 내 무슨 관여함이 있으리오? 네 또 말하되, 인간 세상에서 윤회하는 꿈을 꾸었다 하니 이것은 인간 세상의 꿈이 다르다 함이라. 네 아직 꿈을 온전히 깨지 못하였도다. 장주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다시 장주가 되니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짜인지 분변하지 못했다. 성진과 소유가 누가 꿈이며 누가 꿈이 아니뇨?” 231p          


 위의 대화는 이야기의 결말이자 저자가 을 쓴 취지를 드러낸 구절이다. 삼백여 년 전 김만중은 이렇듯 주인공 성진이 한바탕 꿈을 통해 불생불멸의 도를 얻게 된다는 모범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일상의 꿈을 꾼 나로선 그와 같을 수 없었다. 혹여 오늘이 꿈이라면 이런저런 걱정 다 집어치우고 바람에 몸을 맡긴 낙엽처럼 자유롭게 살리라. 나는 뭐, 이런 철없는 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위와 같은 꿈을 꾸고도 가슴이 철렁해 몇 자 끄적이는 자신이 웃길 따름이었다. 소심한 바람이. 흑흑. 그리고… 글을 발행할까 말까 망설이던 중 재밌게 읽었던 소설 하나가 생각났다.     

 

 세상이 멸망하고 소심한 사람들만 남았다(김이환)’라는 책이다. 팬데믹에 소심함이 오히려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담은, 소심한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꼬마 자동차 붕붕’ 노래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후후후.  

    

 이 책을 추천한다는 핑계로 허접한 글을 발행하는 용기가 내게 주어진 오늘의 선물이었다. 소심한 자들이여 단결하라!     


추운 날씨에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코스모스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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