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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06. 2024

허송세월

오늘의 선물 둘, 서재 털기 1번 -김훈 지음, 나남 발행, 2024-

   새벽 달리기와 구경꾼 비둘기로 흥겨운 학교 운동장이 첫 선물이라면 다음 선물은? 두 번째로 밀려나 억울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두구두구두구~~~ ‘책’이다. 책은 나의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구원해 준 친구이자 사십춘기의 늪을 빠져나오게 한 사다리였다.    

       

 영향력의 정도와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책을 두 번째로 언급한 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책은 쉼의 공간이고 지혜의 보고이지만 내겐 부담이기도 했다. 함께 사는 명석께서 책 주문을 취미로 삼아 매달 열 권 이상의 책이 집으로 배달됐기 때문이다. 동거 십삼 년 차. 나는 책장 보는 것이 두렵다. 분명 세 개의 책장으로 살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실과 방 한 면을 가득 채워도 책 둘 곳이 모자란다. 다시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을 버리고 겹겹이 꼽아도 자리가 없다. 최근엔 바닥에 쌓아두는 양도 만만치 않다.       

    

 책이 집안을 점령하면서 나는 일종의 압박감을 느낀다. 명석은 책 사재기를 끝낼 기미가 없고 그렇다고 딱히 열심히 읽지도 않는다. 종종 책장 앞을 서성이며 작가별, 분야별로 옮기는 행위를 즐길 뿐이다. 아무래도 그는 책의 물성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책 등을 쳐다보다 하나씩 꺼내 쓰다듬고 배치를 달리하는 걸 만끽한다. 그와 달리 나는 빌리든 사든 선물 받든, 어떤 식이든 연이 닿은 책을 두 번은 읽는다. ‘연달아 2 회독’이 책을 대하는 기본자세다. 좋아하는 책은 네다섯 번을 넘긴다. 내게 책은 작가의 영혼과 만나는 일이고 만남 전후의 사소한 변화를 기뻐한다. 책 한 권을 읽는데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나로선 늘어나는 책이 밀린 숙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자꾸 사?”

 “내 노후대책이야. 수입이 끊기면 가장 먼저 문화비를 줄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좋은 책을 사놓는 거지. 책은 사놓은 것 중에 골라서 읽는 거니까.”

 “지금도 눈이 아파서 읽기 힘든데 나중에 읽을 수나 있겠어?”

 “…….”

 “이제 둘 데도 없잖아.”

 “내가 잘 정리해 볼게.”          


 나는 분노와 협상의 도돌이표를 거치다 그를 설득하길 포기했다. 대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계기를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보물 찾기로. 어떤 보물? 훌륭한 문장.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생각을 해 내다니……. 갑자기 흐뭇해져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김훈의 ‘허송세월’이다. 제목이 특히 마음에 드는 ‘허송세월’엔 어떤 보물이 묻혀 있을까 궁금했다.


 작가는 늙기의 즐거움을 논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부고 문자를 통해 몇 줄의 정보로 전달되는 죽음이 마치 이행해야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살면서 애착해 온 것과의 결별. 이 과정을 쓸쓸하지만 견딜 만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책 제목과 같은 세 번째 산문에는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그가 말하는 ‘허송세월’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몸과 마음이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는 그의 허송세월을 여기서 살짝 구경해 보자.      


 여든이 가까워지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그는 슬플 때 웃음이 나오고 기쁠 때 눈물이 난다. 실체를 반영할 수 없는 언어에 무력감을 느끼고 많은 것이 안개처럼 뿌예진다. 그러나 늘 보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 삶의 기쁨과 슬픔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젊은이들의 키스와 노동 후의 술자리, 수능시험 고사장 앞의 풍경이 그랬다. 공원 벤치에 앉아 볕을 쪼일 때가 그랬고 창 너머 알을 품은 새를 들여다볼 때 그랬다. 그는 말이 끊어진 곳, 표현할 수 없고 고정시킬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느꼈다.      


 그는 언어에 대해 깊이 고민했는데, 언어가 적대시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상을 염려했다. 조사, 형용사, 부사에 대한 소회에서는 언어에 대한 조예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글(허송세월 외 산문 포함)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인 생존에 관한 문제도 다루고 있다. 책의 앞장과 마지막 장에 실린 철모 똥바가지 사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생활의 문제를 중요시하는지 그 뜻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책은 시종일관 힘 있고 통찰력 가득한 문장으로 촌철살인의 백미를 보여준다.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와 <개별적 고통을 생각하며>는 토씨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글이므로 전문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밖에 바람이의 마음을 울린 세 문장을 뽑는다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51p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95p     


심장은 목적지가 없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심장은 언어나 논리가 세계를 규정하지 않는 곳을 향해서, 엔진을 벌컥거리며 가고 있었다. 203p       


 이렇듯 작가는 ‘허송세월’에 생의 본질과 삶의 전반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 책을 읽으며 나의 세월은 어땠나, 되돌아봤다. 나는 생명력 넘치는 순간으로 재구성한 김훈의 허송세월과는 다른 의미로 허송세월했다.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바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뭔가를 좇으며 살아간 인생엔 번아웃과 허무함이 남았다. 김훈이 경계한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상실한 태도(284p)는 적어도 나의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늘을 부정하며 보낸 시간은 심각한 허송세월이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제 이런 허송세월은 그만두고 김훈처럼 햇볕 냄새 아래에서 또랑또랑한 소리보다 헛소리더 평화롭게(12p) 여기며 허송세월하고 싶다. 매일매일 새로운 선물을 받는 마음으로.     

<허송세월 중 만난 핑크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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