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다양한 문화 공간에서 작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특강이 많다. 그 덕에 이수명 시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를 시작으로 꾸준히 시집과 시론을 발표한 시인이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던 그는 ‘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특강의 주제로 삼았다. 시를 읽는 방법이 있을까, 시에서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시와 일상의 언어는 무엇이 다른가, 시가 왜 필요한가 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내겐 그 모든 이야기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아 질문의 구분 없이 이해한 대로 간추려보겠다.
산문이 걷기라면 시는 춤과 같다. 산문은 목적지(결론)에 도착해야 글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춤은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결론이랄 게 없다. 시집을 읽을 때는 아무 데나 펼쳐서 어느 부분을 읽어도 괜찮다. 시는 열린 구조로 이루어진 열린 텍스트이므로 끌리는 한 구절을 발견해서 그 말을 마음에 품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의 한 구절은 시 한 편과 연결되고 그 연결은 시집 전체로 확장된다. 결국 시의 한 구절은 시인의 세계관과 직결되므로 시집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어떻게 읽어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계어로 보이는 시를 즐길 수 있는 팁이라도 있을까. 도통 파악할 수 없는 시 앞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시어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우선 일상의 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발설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소통을 전제한 일상의 언어는 상대방이 뜻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면 사라진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냅킨 좀 주세요.” 한다면 A의 말은 B가 A에게 냅킨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대체된다. 그러나 시어는 독자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오해와 오독을 하게 되고 대체될 대상이 없는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남아 있는 말은 독자의 지각과 상상의 영역을 확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시는 상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특이한 방식으로 언어를 조합함으로써 그 언어를 통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비밀스러운 느낌의 세계로 깊이 파고들 수 있을 때 우리는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쯤에서 시어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김춘수의 시(처용) 일부를 살펴보겠다.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수업 중 이 구절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리를 벽돌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생각과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물론 마법처럼 신비로운 이 시어가 나에게 열리는 세계는 아니었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모험심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아리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굳이, 왜 필요할까? 시인은 그 이유를 설득이 힘든 인간의 본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설득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감화되는 존재이기에 감정의 핵심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가 우리의 변화를 촉구한다고 봤다. 우리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감수성으로만 움직인다. 감수성에 깊이 관여하는 시를 통해 고정된 일상에서의 이탈,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 자신을 넓힐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수명 시인도 평소에 보던 저 꽃이 평범한 꽃이 아니고 매일 보는 구름이 달리 보이는 순간, 비로소 그 너머의 세계와 닿았다는 느낌(본인은 비록 ‘환상’이라고 말했지만) 때문에 시를 쓴다고 했다. 나도 그처럼 아름다운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