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보았던 ‘꼬마 자동차 붕붕’의 영향인지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꽃을 찾는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붕붕’처럼 꽃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꽃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만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길가 어디라도 꽃이 보이면 가까이 쪼그려 앉아 향기를 맡는다. 반사적으로 몸부터 움직이는 본능의 영역이다. 냉이꽃처럼 작은 꽃도 지나치지 못한다.
언젠가 친구로부터 꽃을 왜 그렇게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무쳐 먹지도 못하는 꽃’이라고 콕 집어서 말한 걸로 보아 친구는 꽃의 쓸모에 대해 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친구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꽃과 먹는 것을 비교해 본 적이 없었고 뭔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꽃이 좋았다. 굳이 따지자면 꽃이 주는 환함, 생명력, 신비로움을 근거 삼을 순 있겠지만 빈약한 변명일 뿐이다. 그저 좋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터다.
친구의 질문을 받은 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으니 꽃에 대한 나의 집착은 상당히 오래된 편이다. 그 탓인지 나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봄부터 여름까진 몸과 마음이 쌩쌩하다가 꽃 보기가 어려운 계절이 되면 급격히 시들시들 맥을 못 춘다.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는 요즘이 바로 딱 그런 시기의 시작점이다.
위장에 커피를 들이붓고 초콜릿을 까먹어도 머리가 흐리멍덩했다. 낮잠까지 자고 일어났는데 글이 안 써지고 십 분만 모니터를 봐도 눈알이 뽑힐 듯이 아팠다. 흐앙~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눈의 긴장을 풀고 사고를 유연하게 할 겸 산책을 나섰다. 그렇게 늘 다니던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어라? 낯선 풍경이 보였다.
보도블록 위에 크고 작은 화분이 즐비했다. 여기에 꽃집이 있었던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발은 이미 꽃집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또 이러면 안 되잖아. 설렘을 지그시 누르며 근래에 좀, 자주, 꽃을 샀다는 점을 상기하며 그냥 지나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다.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쇼윈도에 붙어 있는 A4 용지가 걸음을 붙들었다. 컬러 프린터로 출력한 종이에는 “오늘의 꽃 5000원”이라 적혀있었다.
아, 이런 참신한 문구라니. 오늘의 커피는 봤으나 오늘의 꽃은 처음이었다. 대개의 꽃값을 생각하면5000원은 착한 편이었다.이 가격에 얼마만큼의 꽃을 주느냐가 관건이긴 한데… 궁금한 건 또 못 참는다. 가성비 좋은 꽃집을 알게 될 기회를 날릴 순 없다. 결국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삼십 대 초반으로 뵈는 앳된 주인장이 종처럼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그러나 막상 가게에 들어선 나는 부끄러움과 어색함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이 되어 우물쭈물했다.
“사장님. 저… 오늘의 꽃은 뭔가요?”
냉장고 안에 꽃이 몇 개 없기 때문이었는지, 게 중에서 가장 예쁜 꽃을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주인장은 아직 꽃 정리가 안 되었다면서 바닥에 깔린 신문지 꾸러미를 하나하나 펴서 보여주었다. 리시안셔스, 해바라기, 백합, 라넌큘러스가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종류를 고르시면 적당히 맞춰 드릴게요.”
주인장은 아무거나 고르라고 했다. 이런 별천지가 있나. 싸장님! 멋져부러. 하트 뿅뿅^^ 행복한 고민 끝에 나는 햇살 장미라는 귀엽고 상큼한 꽃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맴돌았다.
꼬마차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꼬마차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랄랄라라 랄랄라라~~~~
그리고… 나는 지금, 햇살 장미 옆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멋진 선물을 받은 오늘. 오늘의 꽃과 같은 ‘오늘의 선물’에 대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곁들여 책 사재기에 중증(같이 살면 비슷한 버릇을 가지게 된다)인 명석의 서재도 하나씩 해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말인즉슨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쓰겠다는 의미다.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잘한 기쁨에 대한 썰을 풀겠다는 결심. 꽃향기의 힘으로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