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Nov 20. 2024

나도 있어 고양이

오늘의 선물 다섯

 창문을 열어놓았다. 뒷집 마당은 감나무에 날아든 새로 쾌활하다. 공사 현장의 철제 기계음이 가을 소리와 뒤섞여 집안으로 들어왔다. 며칠간 흐리날이 개고 환한 하늘이 창 너머 보였다. 햇살과 바람이 좋아 베란다에 빨래를 널고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였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이 계절의 호사를 누리다 솜뭉치 하나를 발견했다. 저게 뭐지? 아, 고양이 털이었다.      


 글 쓰는 삶을 시작하고 청소는 나의 주요 일과가 되었다. 집중이 어렵거나 허리가 뻐근하면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명석에게 “아따. 할매요. 그만 좀 쓸고 닦으쇼. 몸살 나겄소.”란 소릴 들을 정도로 바지런을 떤다. 종일 끙끙대도 몇 자 적기 힘든 글쓰기에 비해 청소는 즉각적인 성과가 있다. 가시적인 효과가 주는 쾌감에 나는 자주 쓸고 닦으며 열을 올린다. 방금도 막 청소를 끝내고 개운함을 느끼던 차였는데 구석 어딘가에 숨어있던 털이 바람결에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솜사탕처럼 성기게 말린 주먹만한 뭉치에 눈살을 찌푸리려다 말고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털과의 전쟁은 고양이와 살기 위해 매일 치러야 하는 대가이기 때문이었다.


 오오. 고양이. 그렇다. 우리 집에는 두 냥이 산다. 첫째 냥은 흰 털옷을 입은 뽀뽀, 둘째 냥은 잿빛 옷을 입은 소냐도르. 나를 무한반복 청소의 궤도에 올려놓은 녀석들이다. 오늘은 뽀얀 뽀뽀의 털 뭉치를 목격한 김에 나의 기쁨이자 사랑인 고양이를 얘기해보려 한다. 가을바람처럼 시워어언하게 고양이 자랑을 늘어놓고 싶다. 십이 년 차 집사의 애환은 덤으로…     


 우선 이장희 님의 시를 감상하면서 뒷이야기를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해보자. Oh~~ cat~~~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한 세기 전 시인의 눈에 비친 고양이는 봄이었는데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만 해도 내게 고양이는 유체물에 불과했다. 풀꽃(나태주)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볼수록 고양이도 더 예뻐졌다. 요즘은 고양이 매력 대백과사전을 만들고 싶을 정도로 더더더 사랑스럽다. 지금의 나는 지려천박했던 시기의 나를 용서하기가 어렵다. 과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여기, 이 자리를 빌려 고양이의 사랑스러움에 관해 소상히 고하고자 한다.   

    

  고양이는 우주를 품고 있는 물방울 같은 눈동자와 유려한 곡선의 신체를 가졌다. 이런 신비로운 외양과 우아한 자태와는 별개로 집사들은 냥이의 발바닥에 강한 애착을 가진다. 꽃잎처럼 동글동글하고 찰떡같이 쫀득쫀득해서 틈만 나면 만지고 싶은 욕망에 빠져든다. 심지어 쿠키의 고소한 향까지 풍겨대니 그 중독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색상도 얼마나 고운지 선홍빛(뽀뽀), 초콜릿 빛(소냐도르)으로 개체별 개성도 뚜렷하다. 그러나 대개의 고양이는 집사들의 갈망을 사뿐히 무시하고 싫은 티를 낸다. 야멸차게 제 발을 낚아채거나 냥 펀치로 거부 의사를 밝힌다. 그럼에도 계속 발바닥을 조몰락대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잘못은 집사에게 있으니 발바닥 탐닉은 그만두어야 한다. 확실하게 NO를 외칠 수 있는 결기를 존중해줘야 한다.      


 대신 고양이가 좋아하는 부위를 공략하는 편이 낫다. 고양이는 선녀 옷처럼 고운 털을 가졌는데 만져 보면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보드랍다. 하루의 반을 주무시고 깨어있는 시간의 반을 털 손질에 힘을 쏟아 어떤 비단도 고양이 털과 겨룰 순 없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스스로 털 고르기가 어려운 부위를 만져주는 걸 좋아한다. 턱밑과 귓가를 살살 긁어주면(쩝, 내 손이 효자손이 된 것 같다) 고양이 몸통에 행복한 시동이 걸린다. 고롱고롱 진동이 시작되고 집사에게 온몸을 내준다. 이럴 때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발바닥을 만질 기회가 생긴다. 등에 코를 박고 킁킁대도 싫어하지 않는다. 고양이 등에선 햇볕 냄새, 입에선 누룽지 냄새가 난다. 한낮 햇살에 바싹 말린 빨래에 스며든 온기를 품은 냄새다.


 고양이의 진가를 확인하기에 요즘같이 쌀쌀한 날씨가 안성맞춤이다. 평소 가시거리만 고수하던 그들도 추워지면 집사에게 달라붙는다. 주로 겨드랑이나 머리맡에 몸을 밀착시키는데 세상에 이만한 쿠션은 없다. 자동 온열 장치와 진동모드까지 장착한 최첨단 쿠션으로 심신 안정에 최적이다. 게다가 여름에 비해 이동속도가 느린 모기를 잡아주기도 한다. 얼마 전 뽀뽀가 양발로 뭔가를 꾸욱 누르고 있기에 발을 들어봤더니 왕 모기가 깔려 있었다(십이 년간 딱 한 번의 성공). 아아. 어찌나 기쁘던지. 이제까지 비위를 맞추고 살아온 갖은 노고가 한숨에 씻겨 버린 것만 같았다. 처참한 몰골의 바퀴벌레나 뒷다리만 남은 귀뚜라미를 목격한 적은 있지만 모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이마를 쓰다듬고 간식을 제공했다.


 이외에도 고양이의 매력은 끝이 없으나 두드러지게 멋진 태도 몇 가지를 예로 들겠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거리 두기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고양이는 애정을 갈구하는 법이 없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좋으면 꼬리를 부르르 떨면서 기쁨을 표시하고 싫으면 캬악, 하며 화를 낸다. 심심하면 다가와 칭얼대고 귀찮으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한다. 이렇게 호불호를 확실히 드러내니 그의 감정을 오해할 일이 없다. 침범해선 안 되는 경계를 파악하기 쉬워서 건강한 관계 설정이 가능하다.      


 다음으론 애정 표현에 적극적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고양이는 좋아하는 대상에겐 자연스럽게 다가가 냄새를 맡고 몸을 비비고 제 뺨을 문지른다. 무릎이나 배, 등 부위를 가리지 않고 올라와 꾹꾹이도 하는데 손길이 아주 야무지고 정성스럽다. 적어도 하루 십분 마사지는 꾸준하게 해준다. 이런 신체적 접촉도 만족스럽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면모는 대화에 있다. 대체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명석과 달리 냥이는 아무리 귀찮아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편이다. 그것도 온몸으로 말이다. 성대가 아니라 몸통을 울려서 대답하고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쳐들거나 몸을 베베 꼬는 방식으로 바디랭귀지도 시전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대답이기에 나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그 밖에 고양이는 삶을 쿨하게 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고양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분히 즐긴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떼쓰고 더 심심하면 우다다다 뛰어다닌다. 존재 자체가 행복이고 모든 게 만족스러우니 신선의 삶이 따로 없다. 심지어 혼내도 타격감이 제로인 데다 웬만해선 토라지지도 않는다. 싫은 소리는 못 들은 척하고 하고 싶은 건(비닐 빨기, 베란다 풀 뜯어먹기, 쓰레기통 냄새 맡기) 끝까지 한다. 아주 행위 패턴이 일관되고 예측 가능성이 높다. 우리 나이로 환갑이 지나 관절염에, 잇몸이 붓고 피부병을 앓아도 딱히 세월을 한탄하지 않고 여전히 아기 같은 모습으로 천진무구하다.    

  

 이렇듯 고양이는 존중의 증거를 기대할 자격이 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모자를 벗고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The Addressing of Cats의 가사 응용). Oh~~ cat~~~      


 세상의 모든 고양이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다면 뮤지컬 캣츠의 The Addressing of Cats를 들어보길 권고드린다. 그리고 팔불출 바람이의 다섯 번째 선물은 이쯤에서 마무리 겠다.


<뽀뽀는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는데 현재 공식 명칭은 '뽀쉑'이다. 뽀쉑은 '뽀리뽀리뽀리뽀 이 건방진 떵덩어리 고양이 새끼'의 준말이다. 이렇게 불리게 된 사연은 아주 긴데 여기서 설명하긴 곤란하고 그 증명자료로 위 동영상을 첨부했다. 영상 속의 뽀뽀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발바닥을 핥고 있다. 그러나 이 영상을 찍기 오 분 전 저녁 식탁에 난입하여 고추장 그릇에 발을 담그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바람이 뽀뽀를 체포해 욕실에서 발바닥을 씻겼다. 으윽. 흰털에 고추장이라니. 그 후 소파에 기대어 젖은 발을 말리고 있는 을 보고 있자니 인격수양이 덜 된 바람으로선 '뽀쉑'이라 부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전 06화 술꾼들의 모국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