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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22. 2024

당신의 다리는 안녕하신가

오늘의 선물 여섯

*게으름 피우 서재 털기 3번을 완성하지 못해서 몇 주 전에 써뒀던 산행이야기로 대체합니다.


그때는 날씨가 포근했는데 이번주는 기온이 많이 내려갔네요. 우선 속리산의 가을 풍경부터 감상하고 이야기를 읽어볼까요?




 통잠을 자다니 이게 얼마만 인가. 산뜻한 기분에 눈을 뜨니 명석이 묻는다.

 “당신의 다리는 안녕하신가?”

 “응? 다리?”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으악! 소리부터 내질렀다. 근육이 뻐근하고 통증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래. 왜 그랬어?”

 “…… 마음이 힘드니까… 몸을 못살게 구는 걸로 대체하려 한 거지.”

 “그럼 난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은 꼴이네.”

 “머시라? 벼락?”

 “아. 아니. 벼락만큼 경이로운 순간이었단 말이지…”     


 아침부터 시작된 티격태격은 어제의 산행 때문이었다. 명석과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장대에 올랐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블로그의 글을 믿고서 말이다.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곧 다가올 추위 앞의 짧은 가을이 아까워서였다. 꼭 한 번은 문장대의 아름다움을 명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낙방의 슬픔을 정상의 풍경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기대도 있었다. 복합적인 소망이 합쳐져 도착한 속리산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부작위에 특화된 명석은 자발적으로 산에 오른 역사가 없다. 게다가 나는 삼십 대에 다리를 다치고 십 년이 지나서야 완치되었다. 이 둘이 한 손에 우산, 다른 손엔 등산 스틱을 짚고 돌산을 올랐으니 그 과정이 어땠을지 불 보듯 뻔하다. 나야 복합적인 소망이라도 있었지만, 명석은 등산할 아무런 동기가 없었다. 나의 눈총 외에는.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꼭 정상까지 안 가도 돼. 힘들면 언제든지 내려가도 나는 괜찮아.”

 오송 주차장에서 그가 한 말이었다.    

  

 “안 돼. 세 시간이나 운전해서 왔잖아. 여기까지 왔으니 문장대의 풍경을 꼭 봐야 해. 당신도 올라가 보면 깜짝 놀랄걸. 분명 잘 왔다고 생각할 거야.”

 곧 번복할 말을 그렇게 잘도 지껄였다.      


 스물일곱, 펄떡펄떡 에너지가 넘실대던 시절 나는 친구 따라 문장대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의 신체와 지금은 이미 동일성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봉우리에 올랐을 때의 기억만은 선명하다. 산등성을 내려다보는데,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 신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절경이 펼쳐졌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명석과 함께 다시 와봐야지, 했는데 그사이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중년을 지나고 있는 그와 나는 비에 젖어 더 붉어진 단풍을 따라 등산로로 들어섰다. 올라가는 데 1시간 반이라니 하산까지 2시간 반이면 충분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품고서.      


 “헉헉. 여긴 왜 이렇게 돌이 많아?”

 “바람아. 좋은 소식이 있어.”

 “뭐?”

 “문장대까지 1.5km밖에 안 남았데.”

 “아직?”

.

.

.

 “바람아. 저기 구름 사이로 해가 보여. 비가 그친 것 같아.”

 “어. 그러네.”

.

.

 “명석아.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내 기억이 아무리 미화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험한 길은 아닌 것 같아.”

 “여기 길 맞는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봐봐. 길이 점점 좁아지잖아. 정도의 길은 아니었어.”

 “그럼. 여기서 좀 기다려 봐. 내가 혼자 올라가서 보고 올게.”

 “아. 아니.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서갔던 한 남자가 내려오며 말했다. “이쪽은 길이 막혔어요. 잘못 온 것 같아요.”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앞질러 내려갔다.      


 헐…


 망연자실 서 있는데 밑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예요. 이쪽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명석이 소리쳐 대답했다.     


 그렇게 되돌아가는데 어떻게 올랐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가파른 길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참을 내려와 다시 봉우리로 향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은 잘하지만 뒷감당을 못하는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투털대기 시작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자고 했을까, 내가 제정신이 아니지, 인간들은 예부터 왜 이런 험한 산길을 올랐을까… 하며 불평했다.      


 시종일관 부작위지만 일단 판이 깔리면 마무리까지 깔끔한 명석은 용두사미 바람의 등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러면 힘이 덜 들지?”

 “응응. 밀어주니까 다리가 하나도 안 무겁다.”      


 튀어나온 입이 쑥 들어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명석은 어릴 때도 이렇게 해서 나를 밀어줬었다. 다리를 다쳤을 땐 업고도 많이 다녔다. 그동안의 시간이 생각나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렇게 신나게 백 미터쯤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허벅지가 좀…”

“어? 왜?”

 돌아보니 명석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리에 쥐 났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느낌이 이상해.”

 “여기 앉아서 신발 벗어봐.”

 나는 호들갑을 떨며 그를 돌 위에 앉혔다.


 “힘을 좀 빼봐. 안되면 심호흡이라도 크게 해 봐.”

 다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움직이면 무리가 생길 것 같았다.      

 “아파도 좀 참아. 바로 풀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대퇴부를 마사지했다. 안마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조금씩 풀려가는 근육을 느끼며 한참을 주물렀다.      


 “오오. 신기한데. 이제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그래도 조금 쉬다가 가자. 다시 뭉칠 수도 있잖아.”


 오도 가도 못하는 지점에서 경련이라니.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명석에게 지나치게 짐을 지워 과부하가 걸리면 우리 둘 다 꼼짝없이 어려움에 빠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멀쩡해야 그도 멀쩡하다. 정신 차리자. 바람아.     


 다행히 정상석 앞에서 굽이굽이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고 주차장에 내려올 때까지 명석의 다리는 건재했다. 총 다섯 시간의 산행이었다.


 등산 애호가들에겐 어쭙잖은 상황이겠지만 나는 나의 안일함이 그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사실등골까지 오싹했다. 그도 이제 펄떡펄떡 에너지 넘치는 시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낙방의 슬픔이고 뭐고 다 산에 내려놓고 버렸다. 그럼에아침부터 ‘모진 놈이란 소릴 들으니 언짢은 기분에 눈을 치켜뜨며 그를 협박했다.


 “명석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문장대 이야기가 어떻게 써질지… 알지??”


 나는 좀 더 순화된 표현으로 이 사태를 기록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종아리 안마를 받았다. 음하하. 이렇게 글 쓰는 자의 힘은 막강하다. 달콤한 권력의 맛이라니.



<문장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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