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기

하고 싶다와 하기 싫다

by 바람

다다음주까지 완성해야 하는 글이 있다. 연말 변호사회 회지에 실릴 글이다. 처음 요청이 들어왔을 땐 내심 기뻤다. 글을 써달라는 말은 (자칭)작가에게 ‘너의 글솜씨를 인정해’라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감이 다가올수록 슬금슬금 내적 저항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초안이라도 잡아둬야 할 텐데 차일피일 미뤘다. 가깝게 지내는 선후배들이 읽을 거라 기왕이면 재미있는 글을 선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잘 쓰려는 욕심은 글의 시작을 방해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글쓰기를 시도했다. 대충 목차라도 잡아볼 요량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모니터 앞에 앉아서는 겨우 한 줄 쓰고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유튜브로 드라마 요약본을 보다가 웹툰의 ‘기다리면 무료’ 이용권을 사용했다. 오늘따라 드라마는 왜 이리 재미있고 웹툰도 흥미진진한지…… 뒷이야기가 궁금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안 되겠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휴대폰을 멀리 치웠다. 이제 글을 쓰자.


어라? 갑자기 집안이 어지러워 보이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를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고 빨래를 돌렸다. 이참에 옷장 정리라도 할까? 아니다. 오늘은 참자,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끙끙거리며 몇 줄 채 쓰지 못하고 속이 답답해졌다. 진도가 안 나간다.


맞다. 이럴 땐 산책이지. 산책은 창의력의 근원이니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밖을 나가자마자 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상투적이지만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다. 새파란 하늘에 햇살이 눈부셨다. 한반도의 가을 날씨는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임이 분명했다. 상쾌한 공기와 햇살이 몸에 닿는 따뜻한 촉각이란…… 운동화가 지면에 닿는 느낌,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의 날개 짓 소리, 야외활동 중인 유치원생들의 뒤뚱거리는 모습 속에서 분명 창의력이 샘솟을 것이다.


나는 자연의 도움을 좀 더 받기 위해 윗동네 산책로로 향했다. 그곳엔 핑큐뮬리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는데 가을엔 자주색 꽃이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흩날렸다. 핑큐뮬리 위로 쏟아지는 볕이 꽃을 더 붉게 만들었다.


이처럼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큭큭


외투를 벗어 벤치 위에 두고는 달리기를 했다.


매일 달리기를 하는 하루키처럼, 혹시라도 달리면 글이 써지지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목표는 열 바퀴였으나 세 바퀴를 뛰고 나니 숨이 찼다. 다리를 다쳐 13년 만에 한 달리기였다. 제대로 달려본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고작 세 바퀴로도 땀에 젖었다. 달릴 수 있다는 만족감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글쓰기 준비는 충분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아직도, 여전히, 쓰려던 글은 안 쓰고 감정일기를 끄적거리고 있는 중이다.

매번 이랬던 것 같다. 수필을 써야지 하면 소설이 쓰고 싶어지고 소설을 써야지 하면 수필이 쓰고 싶어졌다. 이 주제로 써야지 하면 다른 주제의 글이 쓰고 싶어 지는, 이런 현상은 매번 반복됐다. 카드 돌려 막기 같은 심정으로 무한 반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 하나로 부족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편의점의 최대 사치라는 하겐다즈를 퍼먹으며 영혼을 달랬다.

그럼에도 모니터 앞에 앉을 수가 없어, 베란다에 핀 국화꽃을 잘라왔다. 컴퓨터와 프린터기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도록 나를 유혹해본다. 웬만하면 꽃을 안 꺾는데 이렇게라도 하면 영감이 생길까 싶었다. 노란 국화꽃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아본다.


잘하고 싶으면 더 하기 싫어지는 법. 이 마음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결국엔 글을 시작하겠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