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가 삼락

작가의 고민

글의 무게

by 바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까.


몇 안 되는 글을 써놓고 벌써 고민에 빠졌다. 불특정 다수가 읽는 글의 무게감 때문이다.

무엇이 무거운가.


그 하나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일이다.


내가 쓴 글에 한해 말하자면, 몇 년 전 봤던 책을 들춰보다 유사한 표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면 엥? 어떻게 사고가 이리 비슷할까? 혹시 책에서 봤던 것을 내 생각이라고 믿고 있었던 걸까, 하며 깜짝 놀란다.

처음 보는 책에서 이러한 경우가 생기면 내가 먼저 썼는데, 하는 마음이 든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의 브런치 구독자가 한 자리 숫자(슬프게도 아직 9인)에 불과한 걸로 미루어 다른 작가가 베껴 쓸 가능성은 제로다.

그렇다면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은 왜 벌어질까.

상상력은 기억의 총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이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어서 생긴 공동의 정서와 공동의 언어도 한몫했을 것이다.

두 번째 무게는 정보에 대한 출처를 어디까지 밝힐 것이냐이다.

공교육 혹은 전문서적을 통해 이미 익숙해져 자연스러운 지식이 된 것. 그러나 내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을 그냥 막 가져다 써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쓰면서 상식이라 불리는 대부분이 외부로부터 주입되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시시콜콜 주석을 달자니 주지의 사실에 지나친 설명인가 싶고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다. 결국 별 새로울 것 없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라는 미궁에 빠진다.


세 번째 무게는 수필의 등장인물에 관한 문제다.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거기에 따르는 지인이 소개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지만(지금까지는 말이죠) 작가의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글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혹여 내 글에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한다. 오해는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미화시키기는 어렵다. 내가 느낀 것에 치장을 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간다. 정작 최초에 의도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솔직한 글이 독자나 작가에게 더 유익하리라 본다. 글솜씨 부족에 대한 변명 같지만 지금은 그렇게밖에 못 쓴다(제 글의 노출빈도로 보아 읽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어쩌다 제 글에서 자신이 등장인물이라 여겨지시는 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저라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이 그렇게 그려질 뿐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인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수필만이 아니다. 소설을 써도 글에는 자신의 경험이 녹아날 수밖에 없다. 백 퍼센트, 순수, 픽션의 진단은 어렵다. 어딘가에 찝찝함은 남게 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요로코롬 부족한데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든다. 흑흑. 이렇게 작가의 꿈은 멀어지는가.


하지만 완전무결한 순수 창작을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삶은 결과물이 아니라 언제나 과정이고 그런 삶의 흔적으로 글은 한편씩 완성되어 간다. 너무 지나친 기준을 들이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심각하게 서툴던 연기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할 나위 없는 연기로 인정받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들이 서툴던 시기에 부족한 자신을 나무라며 새로운 배역을 맡지 않았다면 지금의 원숙함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좀 더 써보려 한다. 이따위(?) 글에서 오~~ 하는 글로 변모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아니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더 잘 쓸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는 용도도 괜찮다.

어쩌다 이 세상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작은 울림(그것이 유쾌함이든 공감이든 위안이든)을 준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겠다.


글을 써보면 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를 통과해 나타나지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작가는 책상 앞에 앉아 그저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다. 글이 여물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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