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서울시립미술관)
『진격하는 저급들』은 서울시립미술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러한 탄생 배경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퀴어 문화와 자본 사이의 긴장 관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니까 가능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제도권의 일환인 시립미술관으로부터 얻어낸 지면이 제도가 담을 수 없는 퀴어 예술의 일면까지 비출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질문에 답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또한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얹을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동시대 시각예술에 무지하고, 퀴어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도, 당사자성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온전히 겪어낼 수는 없다고 느꼈다.
단지 독서를 하며 나는 이 기록을 완결된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도이자 경로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탐색의 과정을 어떻게든 남겨두고 싶었다. 이연숙이 동시대 시각문화의 장면들을 비평의 몸으로 '진격'하는 글들은, 책에서 언급하듯 '가로지르다(quer, across)'를 어원으로 하는 퀴어의 힘과도 맞닿아있다. 나 역시 이 작지만 단단한 책에 관해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쓴 바를 정리한 뒤 다음 단계로 횡단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이연숙은 '퀴어하고 저급하고 패배한 것들'을 말하면서도, 그것들을 구제하거나 세탁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지닌 부정성 — 죽음, 자기파괴, 혐오, 수치, 분노, 우울, 실패 — 을 '퀴어'라는 단어의 부속품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퀴어를 퀴어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정서적·경험적 자원'으로 다시 배치한다. ‘퀴어’가 '킨키한/신기한' 정도의 용례로 평탄화되거나, ‘성적 소수자’라는 뜻으로만 단순화되는 것이 아닌 그 의미를 초과하는 순간의 리듬과 폭력성마저 옮겨내고자 한다.
책이 가장 먼저 다루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이연숙은 수치심을 사라 아메드의 말을 인용하며 "숨김과 드러냄의 이중 작용"이라 설명한다. 이 표현은 수치심이 가진 '표면'의 성질을 나타낸다. 대상을 향한 관심이 없다면 수치심도 없다. 그 대상은 타인이기도, 나 자신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그렇게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구멍으로 작동한다. 이연숙은 "바로 이 구멍이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한계이자 가능성이 거하는 장소"라 말한다.
여기서부터 '저급함'이 가진 정치성이 열린다. 저급함은 외부에서 붙인 모욕의 단어이면서도 연결을 끊지 못하는 몸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들켰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연결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 책은 그 아이러니를 향유하며, 치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점유하는 것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정상성의 윤리(건강·쓸모·생산·성숙)를 향해 "그럼 더 저급해지겠다"고 맞서는 태도야말로, 이러한 전술이 작동하는 순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1장은 셀카를 주제로 한다. 이연숙은 퀴어의 셀카를 무엇보다 '슬픔'과 연결 짓는다. 이는 앞서 말한 수치심 개념과도 이어진다. 그는 셀카를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라 일축한 한병철의 진단을 반박하며 오드리 월런의 작업을 호출한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활용한 월런의 셀피 작업을 소녀(퀴어)들의 슬픔의 역사를 "저항의 역사로 재탄생" 시키려는 실천으로 해석한다. 이때 디지털화된 셀카 이미지는 '쓸모없음'의 라벨을 오히려 확대시키며, 정상성의 가치 체계에 균열을 내는 정치적 반격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책의 전략은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5장에서도 반복된다.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온갖 논쟁이 '사적인 해프닝'으로 치부되는 현실 속에서, 닉네임 리타로 활동하는 트위터리안으로서 이연숙은 더욱 한심하고 쓸모없이 굴며 무가치의 가치화를 내세우는 자세를 취한다. 혹은 이런 표현 자체가 오해일 수 있다. 무가치함을 무가치함으로 버려두는 것에서 창출되는 뜻밖의 에너지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의 몸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2장과, 레즈비언 클럽 뉴플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3장은 『진격하는 저급들』에서 하나의 축을 이룬다. 이 두 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패한 몸'의 문제를 다룬다. 몸은 수치심을 입은 채 세계와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이 책의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대상이다.
아서 플렉의 몸은 노동 시장에도, 성애 관계에도, 감정의 궤도에도 편입되지 못한다. 이연숙은 아서 플렉의 마르고 기괴한 몸을 인물의 성격이나 서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몸이 아서 플렉 자체이며, 동시에 <조커>가 다뤄야 하는 유일한 문제라고 단언한다. 그렇게 이 글은 <조커>를 둘러싼 도덕적 평가나 폭력 재현 논쟁을 비껴가며, 논의의 중심을 몸으로 끌고 온다.
물론 이 글은 아서 플렉의 몸을 옹호하는 것이 섭식장애를 향한 오해를 강화할 수 있다는 위험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는 호아킨 피닉스가 아닌 '아서 플렉'의 몸이 있다. 그것은 정상성의 규율을 수행하지 못하는 몸이며, 그 규율을 배반하기 위해 '기계'처럼 사용하는 몸이다. 음식 섭취를 거부하며 자기 파괴를 통해 쾌락을 생산하는 육체.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정치적 수행의 목적으로 존재하는 몸 그 자체의 가능성을 응시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를 이어받아 이연숙은 3장에서 레즈비언 클럽 뉴플을 통해 '과잉 성애화'되어 기호로 환원된 몸을 그린다. 이 에세이에서 뉴플은 개개인의 고유성이 지워지고 매개체로 기능하는 몸들이 관계하는 역설적인 해방의 장소로 묘사된다. 이곳에서 몸은 내 소유물이 아닌 롤플레잉의 대상, 즉 쾌락을 주고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몸이다. 이연숙은 뉴플에서 느낀 감정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패배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 문제 많은 몸들을 도저히 이길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에." 여기에서 패배감은 좌절이 아니라 항복에 가깝다. 이제 이 모순적인 감정을 안고 4장으로 넘어갈 차례다.
앞선 장들에서 저항은 정상의 개념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의 윤리 자체를 과잉 수행해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6장에서도 이연숙은 "비가시성을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조건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묻는다. 나는 이 급진성을 두고 이러한 자기파괴적 전복이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지 고민했다. '어디까지'라는 한계를 상상하는 일 자체가 외부인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일 테지만.
4장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 관한 비평문이다. 이연숙은 먼저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기술이 가진 이질적인 두 갈래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나는 체제를 그대로 따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반문화의 기수였던 펑크의 반동적인 에너지를 지닌, 체제에 반항하려는 길이 있다. 그러나 1989년 게임의 리메이크로 만들어진 게임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엣지러너>에서는, 이미 사이버펑크의 반주류적인 에너지마저 레트로로 해석되어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수치심, 실패, 자기파괴를 무기로 정상성의 질서를 교란하던 '저급함'의 전략이 이곳에서는 이미 체제 일부가 되어 순환하는 것만 같다. 이 책이 제도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 지점에서 아주 미세한 꺼림칙함을 남긴다. 다소 과장하자면 <엣지러너>의 결말이 퀴어 예술의 주체들에게 미리 살아본 미래로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엣지러너>의 '변화의 여지 없이 닫힌' 결말은 단지 서사의 비극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연숙은 이것이 이 세계의 사이버웨어 디자인이 보여주는 철저한 획일성과도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신체를 개조하는 기술은 끝이 없어 보이지만, 그 형태와 감각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이렇게 이연숙은 <엣지러너>가 가진 체념의 정서를 형식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마크 피셔가 말한 '반성적 무기력' —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상태 — 은 바로 디자인의 평면성에 각인되어 있다.
이연숙의 문제의식은 자동화된 경로로 제시된 '죽음으로 향하는 서사' 이전에,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디자인의 빈곤에 있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죽음이 아닌 꾸준히 다른 반항의 방식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다른 욕망을 허용하는 다른 몸, 다른 관계, 다른 배치 등에 있을 것이다. 4장의 제목처럼, '문제는 디자인이다.'
『진격하는 저급들』의 변증법적인 노선을 제시한 4장의 결론을 바탕으로, 마지막 7장의 라운드 테이블을 짚어보고자 한다. "레즈비언 미술은 왜 구린가"라는 도발적인 주제로 펼쳐진 대담은, 레즈비언의 정의를 비워둔 채 레즈비언 미술을 구성하는 수사적 특징을 더듬어간다. 이 과정에서 퀴어 당사자들의 공통된 감각과 경험이 반드시 중요해지는데, 당사자성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이기도 했다.
대담에 참여한 이연숙, 야광 콜렉티브(김태리, 전인), 홍지영은 '하위' 문화로 호명되는 레즈비언 미술이 구리게 느껴지는 저마다의 이유를 이야기한다. 가장 와닿았던 설명은 "밑에 있는 것을 더 위쪽에 있는 기준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사적인 맥락들, 구구절절한 말들이 필요하다"라는 홍지영의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홍지영은 묻는다. 레즈비언 미술은 정말 밑에 있을까. 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주류의 것들이 실은 옆에 있거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대담자들은 레즈비언 미술을 이루는 수사적 특징으로 '구구절절, 성애적, 소주, 가족 내 폭력, 추락, 자살, 엄마에 대한 애증, 마스킹' 등을 경험으로 나눈다. 이 목록은 합의된 정의가 아닌 언제든 흩어질 수 있는 임시적인 표식에 가깝다. 모두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성긴 정의는, 레즈비언 미술을 고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안과 바깥을 구분 짓지 않으려는 시도다. 이는 '상이한 욕망'의 디자인을 상정했던 4장의 결론과도 맞물린다.
안과 바깥이라는 테마는 클럽과 미술관이라는 레즈비언 미술의 장소성 문제로 이어진다. 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레즈비언 미술에 관한 라운드 테이블이 열려야 하는가. 에필로그에서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내일의 미술관은 퀴어 예술의 저급함을 품을 수 있을까. '구림'이 제도권으로 편입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구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영원히 '구림'으로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자기파괴적 체념으로 고착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며 질문을 던질 뿐이다. 전인 작가는 레즈비언 미술의 목표를 '소멸'이라 말하면서도, '소멸 이후'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퀴어 예술의 급진성은 그것을 탐하는 주류 헤게모니에 포섭될 운명을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원사업으로는 깎아낼 수 없는 기획의 결, 미술관에 걸릴 수 없는 하드코어한 작업은 여전히 바깥에 존재할 것이다.
『진격하는 저급들』은 저급함을 구원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포섭, 비가시성, 실패, 체념, 구림, 보존 사이를 오가는 사유의 경로를 기록한다. 저급함이 급진적일 수 있는 조건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불안정 속에서만 다른 정치적 가능성과 삶의 형식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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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퀴어 예술에 무지했던 것이 아쉬웠고, 부지런히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동시대 시각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느꼈다. 책에 관한 리뷰는 텍스트를 텍스트로 정리해야 하는 탓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제대로 시도해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정리를 해나가는 것이 나중에 쌓였을 때 시너지가 날 것 같아, 얇은 책이지만 애써 정리해 보았다. 확실히 계속 연결되어서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진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책을 읽어가며 현시대를 횡단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싶다.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