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으로 살아가기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by JC


일곱 개의 소설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혔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묘사하는 화자’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봄밤의 모든 것』에는 백수린의 끈질기고 침착한 묘사가 가득하다. 특정 인물을 대변하는 화자이든 1인칭 화자이든 인물이 감정과 상황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도, 이 소설에는 주변의 풍경을 응시하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묘사의 문장들은, 어떠한 사건과도 무관한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존재를 조용히 증명할 뿐이다.


백수린의 묘사는 소설 전반에 걸쳐 빈 공간을 채우는 빛처럼 스며있다. 그 빛은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만 같다. 그 물감과도 같은 문장들 앞에서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풍경 안에 존재할 때, 그것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근거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는 풍경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풍경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의 쓸모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흰 눈과 개」 마지막 빛처럼, 풍경은 언제나 우리의 공모자로 곁에 있다.


내게는 이 소설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도저히 모르겠는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풍경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 「호우」의 주인공 소희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 사람은 쓸어낸 풍경 속에서 나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순간을 찾아낸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백수린은 먼저 미래를 살아보고, 그 미래에서 낮고 곧은 시선으로 그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을 빛의 순간을 길어 올린다. 내게 이 책은 그렇게 알아낸 생의 작동 방식을 기술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1. 외면하는 사람

- 「아주 환한 날들」, 「흰 눈과 개」


「아주 환한 날들」과 「흰 눈과 개」는 각각 중년 여성과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깊은 감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거친 생활을 핑계 삼아 그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가장 낯선 타인인 자식과 멀어져 버린 안타까운 부모이기도 하다.


「아주 환한 날들」의 여자는 남편이 죽고, 딸은 결혼한 뒤 혼자가 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고요와 평온. 동시에 철저한 루틴을 갑옷처럼 두르고 사는 그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나간 글쓰기 수업에서도 쓸 내용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맡게 된 앵무새가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정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에 들어와 버린 앵무새와 여자는 천변을 산책한다.


앵무새와의 산책은 여자에게 오래 잊고 지내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 너무 오랜만에 생각 난 과거가 여자는 낯설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이 언젠가 그의 부재를 예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은 차라리 혼자이기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생겨나기도 하는 마음에 여자는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가장 불필요한 감정. 일상의 무게가 지워버린 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온 앵무새를 여자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녀는 식탁에 앉아 앵무새,라고 써봤다. 앵무새가 갔다,라고 쓰려다 가버렸다,라고 썼다. 앵무새가 가버렸다,라는 문장을 보자 너무 고통스러워 그녀는 눈을 감아야 했다. (35p)


겨우 두 달 남짓한 앵무새가 떠나고 여자는 쓴다. 그 기억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일 뿐일까. 나는 여전히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나는 여자의 쓰기가 그가 외면해 온 감정과 멀어진 딸에게 언젠가 닿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천변의 풍경을 여자가 긍정할 수 있는 날, 여자는 눈을 뜨고 그가 못 본 체했던 시간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일은 삶의 잔여가 아닌 본질에 가까운 무엇일 것이다.




뛰어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흰 눈과 개」의 남자 역시 딸과 사이가 멀어진 인물이다. 그는 불안과 우울에 지배를 받아온 약한 사람이다. 죄책감과 책임감 사이를 겨우 오가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을 이고 산 남자에게 찾아온 딸. 어린 진아를 보며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있는 곳을 자기 자리로 느끼기 못하는 이"의 눈을 하고 있구나. 남자는 진아가 "그런 마음을 영원히 모르길 바랐다."


다시 말해 남자에게 진아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진아가 결혼을 해 스위스로 떠났다. "아빠는 위선자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짙은 배신감을 느낀다. 딸을 너무나도 잘 안다고 믿었던 남자는, 딸의 삶을 대신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아는 자신을 다 안다는 것처럼 구는 아빠가 지겨웠을 것이다. 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키우는 건 반대했냐는 물음에 남자는 답한다. "헤어지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까." 그러나 진아는 이런 사람이다. "사실 전 제가 직접 겪어보고 알고 싶었어요."


남자는 언젠가의 끔찍한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 지금의 고독을 선택하는 사람일까. 하지만 외로움이 유예되는 동안, 행복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삶에 결여를 느끼면서도, 딸이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란 사람이다. 남자는 그가 자기 자신마저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남자는 딸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은 진아와 남자가 함께 바라보는 개와 노부부의 풍경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다리 하나 없이도 천진하게 뛰어노는 개를 보며 부녀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나는 남자가 느낀 감정이 막막함을 딛고 다시 생의 궤도에 올라탄 생명의 놀라움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남자는 개를 보며 상처와 외로움을 긍정하는 생을 아주 잠시나마 목격했을 것이다. 진아는 그런 아빠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들은 서로가 실은 얼마나 다른 존재임을, 그러니 각자의 방식을 만들어 살아내야 함을 알았을 것이다. 뛰어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2. 이해하고, 이해받는 순간

- 「빛이 다가올 때」, 「봄밤의 우리」, 「눈이 내리네」


「빛이 다가올 때」, 「봄밤의 우리」, 「눈이 내리네」 세 소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시절이 뒤늦게 의미가 되는 순간을 쓴다. 이 책에서 자기 자신을, 혹은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결코 극적인 깨달음으로 도래하지 않는다. 백수린은 아주 넓고도 좁은 시선으로 오랜 세월을 아우르며, 과거로 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르는 한 순간을 회복해 낸다. 그때 각 소설의 인물들은 타인과 아주 잠시 겹쳐진다. 백수린은 이해라는 사건이 언제나 시간에 기대어 서서히 벌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꼭 인생을 모두 살아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글을 쓴다.


세 소설은 모두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는 삼십 대 초반의 '나'가 여덟 살 위 인주 언니와 함께 보낸 뉴욕의 시간(「빛이 다가올 때」), 스물여섯의 '그녀'가 열두 살 위 유타와 겪었던 파리 유학 생활(「봄밤의 우리」), 이십 대 초중반의 '다혜'가 서울 이모할머니 모과나무집에서 보낸 무수한 계절들(「눈이 내리네」)이 있다. 세 이야기에서 공간적 배경과 인물 간의 나이 차이는 필연적인 설정이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 도착한 뉴욕, 파리, 서울이라는 머나먼 외지는 각 주인공에게 부유감을 심는다. 그곳은 너무나도 낯선 공간이자, 언젠가 떠나야 하는 임시거처다. 그렇기에 먼 미래에서 돌아보았을 때 한없이 생경해지는 시절이기도 하다.


또한 백수린은 세 주인공과 그들이 시절을 공유한 사람의 나이를 미묘하게 조절한다. 그렇게 그 나이가 되어서야 볼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을 복원해 낸다. 대학교 1학년 다혜에게 스물일곱의 준우가 얼마나 다른 사람처럼 보였는지를 생각하면, 인생 어떤 무렵의 나이란 타인을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인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겨우 한 걸음이면 내가 저곳에 있으리라는 걸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한다.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란 실은 그렇게 단순하고 단순한 것일 때가 많다. 세 주인공에게 언니, 유타, 이모할머니는 그 시절을 정의하는 인물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생의 한 구간의 일부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신기한 일이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불현듯, 그때 당신의 마음이 바람처럼 다가오고, 또 지나간다는 것이. 우리는 몇 번이고 과거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해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마음을 상상하는 일이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봄밤의 우리」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예상치 못한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이해받을 수도 있다는 것.


유타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은 극복이 안 되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는 유타가 그 밤 해준 말을 오래도록, 시간이 또다시 아주 많이 흘러 유타와 더 이상 연락을 할 수 없게 된 이후에도 기억했다. 그 봄밤의 모든 것을. (105p)


'봄밤의 모든 것'은 주인공이 이 순간을 유타의 말과 그것을 둘러싼 총체적인 풍경으로 기억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모습은 이런 것이다. 이때 '이해'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같은 시간 안에 잠시 머무는 일이다. 백수린이 장면으로 삶을 재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다. 백수린은 이 대목을 쓰며 '그녀'의 시점을 초월한다. 문장은 자연스럽게 시간을 건너 먼 미래에 있다. 이것이 처음에는 먼저 살아본 자의 시선 같았지만, 지금에서야 백수린의 희망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람'으로서의 희망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가능성'으로서의 희망이 되어버리는, 그런 희망. '그녀'가 봄밤의 모든 것을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도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기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앞서 세 소설이 모두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고 썼지만, 「눈이 내리네」의 구성은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앞선 두 작품이 과거를 지나 현재에 다다르듯이 「눈이 내리네」 역시 이모할머니가 죽고 삼십 대 중반이 된 다혜에게 도착한다. 하지만 백수린은 거기서 잠시 시간을 돌려, 다혜가 마지막으로 이모할머니를 찾아갔던 날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봄밤의 모든 것』 수록작 가운데 이 작품만이 과거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닫는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 (209p)


나는 이 마지막 대목을 곱씹으며 백수린이 얼마나 시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앞서 백수린이 인생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글을 쓴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다혜는 이 소설을 쓰던 백수린이 얼마 전 지나온 나이대의 인물이다. 백수린은 아마도 알았던 것 같다. 늙은 이모할머니의 마음에 관해서는 쓸 수 없다는 걸. 앞서 '나'와 '그녀'는 약 10년의 시차를 거쳐 각각 인주 언니와 유타를 조금씩 알아간다. 하지만 다혜는 다르다. 스물여덟의 다혜는 죽음을 앞두고도 위험한 수술을 받으려 하고,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이모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다혜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이모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그래서 수술도 하는 거야."


"처음에 다혜는 이모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놀라움 속에서 할머니가 말하려고 한 바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모할머니는 죽음이 아닌 삶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다혜는 저 나이의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무수히 많은 첫눈을 봐왔을 이모할머니가 또다시 첫눈에 감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이해했다'는 표현의 의미다. 그러나 그 마음이 정말 무엇인지 다혜는 알 수 없다. 그건 손등의 피부가 온통 주름으로 뒤덮인 날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수린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마지막은 백수린이 자기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노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젊은 날의 오만과, 여전히 그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자각을 모두 담아 백수린은 저 문장을 적어갔을 것이다. 쓸 수 없는 것은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눈이 내리네」를 서른다섯의 현재가 아닌, 스물여덟의 과거에서 마칠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구성하는 선택은 백수린의 겸손과 공명한다. 언젠가 이모할머니의 나이가 되어 다혜는 무엇을 알게 될까. 그 상상에 벌써 몸 어딘가가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3. 부재의 자리

- 「호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호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 이르러 부재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두 소설은 '아무것도 아닌' 자리가 빈 공간이 아닌 상상의 장소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몸을 싣는다. 「호우」에서는 "아무 일도 없어"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나온다. 어머니도, 소희도, 아이도 무슨 일이 있냐는 물음에 '아무 일도 없다' 말하는데, 주변 인물들은 그 말 뒤에 숨은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무엇도 벌어지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동심원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 알게 된다. 옥탑방에 홀로 살던 노인이 죽었고, 그 죽음이 소희의 마음에 거대한 파문을 남겼다는 것을. 소희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아, 죽음은 얼마나 커다란 사건인가." 그리고 노인이 사라진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 안에서 소희가 느끼는 것은 무력감일 뿐일까. 소희는 밤에 눈을 감고 "존재했던 삶의 부재가 마음속에 그려놓는 드라마"를 응시한다. 이때 백수린이 붙들고자 하는 것은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을 감당하는 감각이다. 그 감각은 설명도, 공유도 되지 못하지만 분명 떨림으로 존재한다. 「호우」는, 우리가 경험한 일이 세계의 언어로는 단지 부재로 남을 때, 그 일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묻는다. 어쩌면 이 소설집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책의 마지막 소설은 40대 후반에 이른 유적 탐사 동아리였던 네 명의 중년 여성들 이야기다. 네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함께 숲속 리조트로 여행을 간다. 아르헨티나 남자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주미, 결혼 후 신도시에 살고 있는 소희와 결혼을 하지 않은 다혜와 '나'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조금은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서로의 감정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떠난 곳에서 네 사람은 찬찬히 대화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절반은 아이, 죽은 아버지, 대학교 시절 등 이들의 일상적인 대화로 구성된다. 나머지 절반은 주미가 독일 유학 시절 겪은 일화로 이어진다. 이 소설에서는 후자 에피소드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앞선 대화가 단지 주미의 사연을 소개하기 위한 전초로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백수린이 복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하릴없는 말의 오고감이기도 했을 테니까. 대학교 졸업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들은 서로가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 틈이 만들어낸 조금의 불편함이 천천히 무화되는 동안 리조트에는 밤이 찾아온다.


왜 백수린은 주미의 에피소드로 소설집을 마무리했을까. 내게 이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들린다. 주미네 부부는 유학 시절, 우연히 머물게 된 한 소도시에서 끔찍한 밤을 겪는다. 벽난로 안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날갯소리 때문이다. 벽난로를 뜯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떤 생명체가 고통스럽게 갇혀 발악하는 소리를 밤새 들어야 했던 기억은, 이들 부부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심었다. 죽어가는 하나의 세계 앞에서 무력하게 그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늘 겪는 세계에 관한 현존이지 않나.


그런데 이틀 밤을 간신히 보낸 뒤, 관리인을 통해 벽난로를 열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 후 어느 날 그 집의 주인은 주미네 부부가 경험한 일을 다시 겪었고, 이번에는 벽난로 가림판을 치우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다시 말해 그날 밤 벽난로에는 비둘기가 있었고, 그것이 벽난로를 열기 직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출구를 찾아 사라졌다는 것.


곧 이 이야기는 비둘기가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벽난로를 빠져나갔을 거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만, 백수린은 다리 하나가 없는 개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흰 눈과 개」의 남자처럼 우리를 벽난로 앞으로 데려간다. 그리고는 좁은 출구를 찾아 고결하게 날아간 비둘기를 보여준다. 정확히는, 그러한 상상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백수린은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만큼은 볼 수 있는 것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부재의 자리가 얼마나 생의 박동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비둘기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을 믿어볼 수 있게 된다. 몇 번이고 다시.


주인공인 '나'는 주미에게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산 너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주미의 믿음과 산등성이를 따라 생겨나는 희미한 빛이 나란하게 병치된다. 그 순간 소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는 주미의 이야기를 통해 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 풍경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세월이 흘러 에필로그처럼 찾아오는 지나간 풍경 앞에서 우리는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그 앵무새는, 언니에게 개리는, 유타에게 할머니는, 그 봄밤에 봤던 달은, 개가 뛰어다니던 광경은, 죽은 이웃 할아버지를 생각하던 시간은, 모과나무집에서의 시절은, 첫눈을 보던 이모할머니의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답할 마땅한 언어를 우리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다". 그렇게 우리는 풍경을 붙든다. 풍경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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