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할 수 없는 마음을 향해

최은영, 『밝은 밤』(문학동네)

by JC


자취방 이사를 돕기 위해 엄마가 대전에서 올라온 날이었다. 엄마가 가지고 올라온 짐을 간단히 정리해 두고 청소를 한 뒤, 우리는 함께 대전으로 내려갔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보조석에 앉아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님이 결혼을 하고 처음 살던 빌라 꼭대기 층 전세방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내가 몰랐던 결혼 초기 엄마와 아빠의 얘기. 어쩌다 물꼬가 터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화호를 건너가던 중이었다는 건 생각난다. 그런 날이 있다.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줄줄 이어지는 날. 출발할 땐 저녁의 입구였던 하늘이 어느새 노을을 거쳐 어두워졌다.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엄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이후 당신이 어떻게 짐과 빚을 떠안고 그것을 해결해 왔는지. 어릴 때 엄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들어도 괜찮은 나이가 된 것이다. 그간 자세히 알고 싶었던 이야기의 내막을 들으며 그때마다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했다. 또 이제는 아빠의 마음도 같이 헤아리게 되었다. 그 일은 역시 무력했고.


또 다른 흐릿한 기억. 중학교 때였나.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던 정말 짧은 시기가 있었다. 엄마가 드리던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할머니와 한 시간 정도 중보기도실에 함께 있었나?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확실한 건 할머니가 내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세 아들을 키우던 이야기. 서술은 주로 첫째 큰아빠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가 할머니와 함께 서울대에 시험을 보러 갔던 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할머니는, 시험장에서 나와 앞서 걷던 큰아빠의 경쾌한 걸음걸이를 보며 합격을 예측하셨다고 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셨다고. 그 말은 꽤 선명하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들. 어쩌면 흔한 가족사. 결혼과 이혼, 누가 사기를 당했고, 누가 빚을 졌고 그저 그런 것들.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엄마의 얘기들을 모아 당신의 삶을 그려보는 일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빠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외할아버지의 고모부는 어떻게 일제강점기에 청주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져 버릴 그 이야기들을 거슬러 낱낱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물어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퍼즐을 맞추듯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조합하고 조용히 어른들의 말들 안에서 새로운 조각을 찾아내곤 했다.


나는 끝내 알지 못하게 되겠지. 소설을 읽으며 그게 못내 아쉬웠다. 부럽기도 했을까. 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전해져 지연의 알 수 없는 마음에 닿아가는 이야기가. 특히나 굵직한 가족사에서 배제되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질 수 있었을 여성들의 이야기였기에 그 마음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무수한 대목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터지려 했다. 그건 내게도 마음이 있다는 몸의 증거였다. 차마 만질 수 없는 마음을 오역해 내놓은 단출한 문장에도 내가 감히 그 마음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증거. '~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라고 소설이 반복해서 서술할 때마다 아득해졌다. 내 마음에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마음들을 겨우 모아 둔 저수지가 있다. 그렇게 막아두어야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게 넘칠 것 같을 때면 버거웠다. 이 소설에서는 그곳에서 마음을 퍼내 문장을 건져 올리는 이의 손이 보였다. 그 마음은 또 무엇일까.


엄마, 할머니, 증조모라는 호칭은 지연이 그들을 부르는 방식이다. 곧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자기 마음에서 복원시켰다. 그렇게 길 따라 이어지는 이해의 여정이 닿은 곳은 바로 자기 자신. 지연은 마침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야기는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부터 그의 새로운 시간이 이어지겠지. 그러나 궁금했다. 이를테면 지연의 엄마가 품고 살아온 마음이. 그것을 지연의 문장이 아닌 엄마의 문장으로 읽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소설이 전부는 풀어낼 수 없는 마음들을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서 깜깜해지곤 했다.


해명할 수 없는 마음을 향해 쓰이는 글이 있다. 여전히 내 안에는 건드리기엔 겁이 나는 감정과 상황이 광산처럼 쌓여있지만, 그럼에도 글쓰기는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내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소설을 읽는 일은 마치 그러한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캐내보는 대체 글쓰기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알아간다고 느낄 때마다, 마음을 풀어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걱정했다. 지연은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제 자기를 돌아보고 이끌며 살아갈 수 있겠지'라는 믿음을 소설에게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삶의 난제를 그저 덮어두고 살아갈 사람들이 떠올랐다. 소설이, 글이,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엉키고 엉겨 붙은 삶의 덩어리들. 내가 그렇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다음으로는 걱정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 자체가 일상을 위협하는 일이 되는 사람들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삶들을. 스스로를 돌아보며 알게 된 감정과 깊이를, 그러나 그것을 안고 사는 게 너무 힘에 겨운 사람들을. 결국 모든 걱정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해결될 수 없는 마음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이 생겨버린 인생으로도 정말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새비를 잃은 삼천 할머니가 지내온 몇십 년의 시간을 나는 손가락으로 세어볼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일은 내게 마음이 점점 나약해지는 일인 것만 같은데. 살면서 한 번쯤 겪어보길 잘한 경험이었어, 라는 말로 넘겨낼 수는 없는 기억이 생겨버렸을 때. 살아남은 이별, 사그라든 희망과 함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나는 그래서 엄마의, 형의, 아빠의, 할머니의 삶을 궁금해했나 보다. 나와 가깝고 지난하게 얽힌 그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삶의 방식을 만들어 살아내고 있는지 상상하는 일은 버거웠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겠지.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듬더듬 아주 간신히 알아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나의 방편과 마음일 뿐. 나의 쓰기와 나의 걸음을 통해 기나긴 밤들을 통과해 가며 몸으로 체화해갈 수밖에 없는 것들. 최은영 작가의 쓰기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게 없는 인생. 소설이 건네준 밝은 밤을 받아들고 싶은데, 여전히 내 앞에 놓인 밤은 너무 까맣고 크고 넓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도 이렇게 말해야 해서 너무 미안한데, 나는 그래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지연에게 말하고 싶었다.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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