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C Mar 27. 2022

여전히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난 있잖어~ 힙합을 하고 싶었어요~

(랩이 나와요 주의 !)

(instrumental: https://www.youtube.com/watch?v=XjyNnYrlEb8)


버스 맨 뒷자리 햇살이 비쳐

포근한 오후는 아른거리네

먼지 낀 창가의 하늘은 잊었던

느낌을 되찾고 감은 눈 이제야

떠졌네 수없이 걸어댔던 이곳

난 내려 살짝 변했네

기억에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

수능을 코앞에 둔 저녁엔

생각보다 없었지 별생각

하늘의 별에다 얘기했어 어떻게든 되겠지

자포자기는 아니었고 베개 밑엔

그래도 항상 희망이 있었네

조금 더 back 좋은 게 좋은 줄도 몰랐던 때

언덕 위의 외딴 학교 평범했던 고등학교 생활 속

우린 틈만 나면 짬짬이 행복을 쌓았지

잠깐씩 날 스쳐가는 그때의 우리

급식실 가던 길 홀로 오르네

길어진 머리를 한 오늘의

난 달라졌나 어딜 가나 있는 어려운 질문

그때도 창가로 가 했던 고민들

숫자를 넘어선 것들이었지

남몰래 접은 이면지

속에 끄덕이던 어린 날의 여린 내 몸짓



진짜 오랜만에 외장하드를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다. 지금 나한테 남아있는 유일한 랩 가녹음본 파일이다. 가사는 두 번째 수능을 치르고 고등학교를 다시 찾아갔을 때 느꼈던 감상을 적은 것. 그러니 벌써 7년 전이다. 이 파일은 그로부터 또 1년 정도가 지나, 폰으로 아카펠라 녹음한 걸 친구가 간단하게 비트 위에 얹어줬던 것이다. 사실 그 뒤 가사를 대폭 늘려 1, 2, 3절과 훅을 만들었고 그 버전으로 복학한 뒤 학교에서 공연을 했었다. 그러니까 이건 러프한 스케치 버전의 파일. 저장된 이름도 '여전히 옛날 버전 가녹음'이다. 이거 말고도 몇 개 더 동아리에서 녹음한 게 있었는데 다 어디 갔나 없고 이것만 남아있다.


랩은 나한테 처음 '쓰기'의 재미를 알려준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 학교나 도서관에서 몰래몰래 시험지나 가정통신문 뒤에 가사를 적곤 했고, 그건 두세 명의 친구 말고는 아무도 모르던 나만의 조그만 일탈이었다. 그렇게 쓴 가사를 도서관 오고 가는 길 공터에서 뱉어보곤 했다. 그때 쓴 가사들은 내보이기에는 좀 부끄러운 것들. 그나마 재수할 때쯤부터는 좀 가사답게 가사를 쓰게 됐다.


대학 입학 후에는 힙합 동아리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공연을 했다. 무대는 엄청 재밌었다. 내가 은근 마이크 체질이라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할 때쯤 나는 힙합보다 영화나 책, 아니면 시가 조금 더 좋아져 있었다. 교내 공연 몇 번을 마지막으로 힙합 동아리를 나왔다. 그 뒤로도 많은 가사를 썼지만 그 가사들은 무대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녹음도 하지 못한 채 저기 메모 파일 사이에 잠들어 있다.


행동력 없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 그런지 학교를 다니면서 결국 사고 싶었던 마이크도, 녹음 장비도 사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씁쓸한데, 세상에 제대로 나와보지도 못한 열심히 쓴 가사들한테 미안해서 그렇다(지금 이 6년 전 파일을 올리는 것도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깝게 느껴져서다). 오랜만에 유일하게 남은 이 파일을 몇 번 반복해서 들었다. 랩이 군데군데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뭐가 됐든 이 가사 엄청 순수한 거 같아서 웃겼다!




뭔가 창문이 더럽고 사진도 이상하고 학교도 촌스러워서 그런가 엄청 옛날 사진처럼 보이지만.. 10년 전쯤 사진이다. 옛날이긴 한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나는 세상의 창가에서 숫자를 넘어선 고민을 하고 있는 건 똑같은 느낌. 고등학교 때 정신없는 애들 사이에서 살짝 빠져나와 혼자 창문에 기대 밖을 보고 있으면 좋았다. 배경과 위에 첨부한 못난 사진 역시 그때 내 갤플로 찍었던 거다.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놀고 공부하며 생활했지만 아마 애들도 한 명 한 명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궁금하다. 나는 여전히 그런 순간을 모아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성격이 조금씩 변해왔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차근차근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도 같다. 어떤 날은 중3 때부터 그대로 시간만 흐른 것 같을 때도 있고. 시간이 점과 점을 잇듯 존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모든 게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나 혼자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내가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는 걸까 엄청 소심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예전에 썼던 가사를 막 읽으면서 랩을 슬쩍슬쩍 하다 보면 아직 내 안에 이걸 좋아하는 마음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럼 꼭 언젠가 다시 랩을 해야지 싶고. 진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도 나는 내가 계속 뭔가를 쓸 수 있을지 의심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맨날 그랬다. 그러다 뭐라도 하나 써지면 되게 안심하고. 나는 확실히 그렇게 열정적인 사람은 못 된다. (사실 되고 싶다.) 그런 사람들 보면 되게 작아진다. 그래도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야지. 지금은 일단 그 정도면 됐다.

작가의 이전글 굿 리스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