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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r 30. 2022

설거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작은 기억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는데 왜인지 잊히지 않고 남아있는 영화 속 장면이 있는가. 내게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이 설거지를 하던 장면이 그중 하나다. 5년 전 대학교 여름 방학, 해가 쨍쨍했던 날. 본가 거실에서 혼자 처음 영화를 보던 기억이 난다. 나는 단숨에 이 영화를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룸메이트가 있던 기숙사 생활 때와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과 함께 차근차근 새로운 공간에 적응해 갈 때쯤, 이상하게도 설거지를 할 때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정원이 집에 들어와 평소처럼 약봉지를 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설거지 거리가 쌓인 개수대를 바라본다. 곧이어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는 정원의 손과 실루엣. 물기가 마르도록 가지런히 엎어놓은 그릇들까지.


나는 내가 그 모습들을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그제야 깨달았다. 그만큼 내게 인상적인 장면은 아니었던 셈이다(그 외에도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너무 좋은 장면이 많았으니까). 그 씬은 참 명백히도 정원이 삶을 천천히 정리해가는 과정에 관한 은유로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을 생각하며 설거지를 할 때마다, 삶을 마무리하는 것만 같은 정갈한 감정을 정원에게 나눠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취방에 흐르던 잔잔한 우울이 기억 속 정원과 기묘하게 공명했던 걸까. 그래도 왜 하필 그 장면이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감정을 새삼 들여다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 자취는 일상의 자잘한 루틴을 지켜야 돌아가는 방구석을 매일매일 체감하는 일이었다. 산다는 건 청소와 밥 짓기, 설거지와 분리수거의 연속이구나, 하며. 바빠서 집안일을 조금만 소홀히 하면 바로바로 티가 났다. 그렇게 나와 공간을 간신히 단정하며 살았다. 그러니까 ‘설거지’는, 이번 끼니를 정리하는 일일뿐 아니라 다음 끼니를 위한 사전 직업이기도 했다. 정원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차곡차곡 그릇을 정리하며 다음 끼니는 뭘 해 먹지, 했을까. 하나하나 뒤집어 놓았던 그릇들을 재차 꺼내는 정원의 마르고 볼품없는 손을 그려본다. 동시에 아직 그가 살아가고 있던 일상을 되감아 보고 싶다.


어둠 속에서 노트북 불빛에 의지에 손을 바라본다. 굵은 핏줄 몇 개와 손가락 마디마디, 그리고 살 없이 툭툭 튀어나온 뼈대들. 손은 뼈의 모양을 가장 적나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신체 부위다. 요즘 나는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본가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내려왔다가 다시 자취방으로 올라갈 때면 언제나 아빠와 엄마를 위해 손을 두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근육이 죄다 빠져버린 아빠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엄마 대신 계속 집안일을 덜어줄 수 있는 손을. 그러면서도 본가에 있으면 자주 답답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나. 그래도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하는 중이다. 일상은 그 뜻이 무색하게도 어느 날 제 모습을 한순간에 바꿔낼 테니까. 그때마다 변화하고 익숙해지는 생활을 가장 앞에서, 가장 덤덤하게 마주하는 건 다름 아닌 손이다.


바꿔 적어본다. 손은 가장 적나라하게 마음과 일상을 보여주는 신체 부위다. 나는 정원의 손에 묻은 생의 딱지를 만지고 싶었던 걸까. 설거지를 하는 소리와 동작만이 작고 고요한 방에 고여가던 때. 정원에게 설거지는 꺼져가는 일상을 무표정으로 지켜내는 가장 상투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같이 보살피고 싶다고 느낀다. 이제 나는 그의 설거지를 더 담담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정원에게 남아있던 똑같은 일상과, 물을 맞으며 그릇을 문지르던 맨얼굴의 손을 조금 더 소중히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그것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겪어내야지. 자취를 시작한 뒤 집에 내려와도 가족과 밥을 따로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깨끗이 닦아놓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엄마 아빠와 함께 먹는 시간도 있다. 엄마는 항상 내가 하는 게 훨씬 빠르다며 설거지를 하려 하시지만 내가 선수를 치는 날도 있고. 그럴 때면 기분이 괜찮다. 곧 자취방에 올라가 혼자 겪어낼 하루하루가 많이 두렵지만 그래도 꿋꿋이 설거지를 하며 지내야지.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202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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