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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Mar 31. 2022

멀미

내가 나를 이끄는 삶이 가능할까?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했다. 어떤 종류의 탈것을 타든 여지없이 멀미를 했다. 멀미는 내가 실시간으로 수척해지는 걸 느낄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이랄까.. 주요 원인은 냄새였다. 아직 새 차 냄새가 다 빠지지 않았다거나, 기름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차에서는 코를 막지 않으면 구토가 올라왔다. 관광버스에 타면 나는 특유의 냄새 역시 힘들었다. 지금도 그걸 떠올리니 약간 어지럽다. 하지만 냄새에 충분히 익숙했던 엄마 차에서도 멀미를 했으니 냄새는 멀미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기보다는 멀미를 돋우는 역할 정도? 그래도 엄마 차는 그나마 나았는데, 뒷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머리가 망가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으니 마음껏 바람에 얼굴을 내맡겼다. 여름에 계룡 할머니 식당에 가는 국도에서 창문을 열어 맞던 바람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면 멀미가 나지 않았다.


학교 수련회를 갈 때는 대체로 창가 쪽 자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한 번은 관광버스에서 육포를 먹으며 멀미를 극심하게 했다. 그 뒤로 학창 시절 내내 육포를 보기만 해도 멀미를 느꼈다. 멀미에 대해 어른들은 저마다 다른 조언을 건넸다. 귀밑에 붙이는 패치를 챙기라고 했지만, 그건 내게 효과가 없었다. 나중에 커서 직접 운전을 하거나 보조석에 앉게 되면 멀미를 안 할 거라고도 하길래 적당히 어릴 때만 넘기면 되겠다 했다. 먼 풍경을 보라고도 했다. 근데 나는 이미 멀리 보고 있었는 걸. 그래서 그냥 어떻게든 잠을 청하는 쪽을 택했다.


언젠가부터 멀미를 전보다 잘 느끼지 않는다. 아직 운전을 하지는 않지만 어릴 땐 아빠 자리였던 보조석에 내가 앉을 일이 많아졌는데, 정말 보조석에 앉으면 멀미가 나지는 않더라. 그것도 참 신기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버스에서도 멀미를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지하철은 멀미가 나지 않는 요상한 탈것. 그래서 처음부터 지하철이 좋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레 졸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아무튼 서울에서 몇 번 탔던 밤 택시(얘는 생명의 위협도 같이 온다) 정도 말고는 멀미 때문에 힘들어본 기억이 근래에는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멀미가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 단지 비유라기보다는 체감의 영역에 가깝다. 멀미는 몸의 반응이니까. 하루가 가까운 풍경처럼 재빠르게 지나가고, 시간은 먼 풍경처럼 흘러가는데 그게 똑같이 느껴져서 멀미가 난다. 그럴 때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싶은 것도 생각해 보면 똑같다. 이제는 정말 취준이라 불리는 생산적인 모종의 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멀미에 허덕이고 있는 기분이다. 아찔하고 아득해.


당연한 말이지만 직접 길을 걸을 땐 멀미를 하지 않는다. 그때는 내 속력과 세상의 속력이 같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세상을 마주하는 속도와 세상이 나를 지나쳐가는 속도가. 걷기란 내가 나를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무언가가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느리게 느리게. 그러니 걷기는 도움이 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글쓰기도 걷기와 비슷한 것 같다. 정처 없이 걷듯 내가 문장을, 문장이 나를 이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그때 문장은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나아간다. 아마 이건 지금 이 글을 쓰느라 할 일을 하지 않는 내게 보내는 변명이겠지만. 그래도 잠시 머리가 복잡하지 않다. 멀미가 먼바다처럼 잔잔해진다.


멀미는 나를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것 내부에서 오는, 필연적으로 그런 형태의 것이다. 지금은 내가 가진 속도를 무시하며 나를 수동적으로 끌어가는 것 안에서 벌어지는 몸의 거부반응처럼 느껴진다. 정해진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어지럽게 하는 걸까. 그러나 직접 박차고 나와 세상을 걷기에는 내가 나약하게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은 차 뒷좌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문이라도 열고 싶다. 그때 모아 둔 바람이 아직 남아 있을까? 다시 바람을 모을 수 있을까? 이제 나는 혼자서 창문을 열어야 하는데. 어릴 땐 그게 쉬웠는데 지금은 참 어렵다.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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