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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DITOR Jan 07. 2020

[2018.9] 무음의 연주

What We're Reading #162

짧은 여름 휴가의 마지막 날, 제주도 바닷가 근처 작은 서점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동네서점에서만 살 수 있는 책으로 재탄생한 피천득 수필 선집 <인연>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습니다. 교과서 수록 글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멀어졌던 <인연>과 오랜 시간이 흘러 극적으로 재회한 순간이었죠.


휴가를 기다리는 8월 한 달 동안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커리어 면에서 어떤 포지션을 목표로 삼겠다는 건 아니었고, 굳이 분류하자면 어떤 태도를 갖고 살고 싶은지에 가까운 고민이었달까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행히 <인연>을 몇 페이지 넘기다 제 고민을 안아주는 글을 만났습니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 있어서는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각자의 맡은 바 기능이 전체 효과에 종합적으로 기여된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無音)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노력의 집약으로 탄생한 하모니는 연주자들 스스로가 먼저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단단함과 자신감이 다시 청중에게로 흘러가죠. 거기에 무음의 연주에 대한 이해와 서로를 향한 신뢰가 모인다면, 정말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무음의 연주'야 말로 하모니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독주자의 악기 소리를 온 힘을 다해 듣는 일이 무음의 연주일 수 있고, 전체 곡을 이해하는 일이 무음의 연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음의 연주가 지닌 존재감을 이해하는 연주자만이 자신의 연주에서 과욕을 부리지 않되, 그 순간을 진정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연주도 진심으로 격려할 수 있고요. 책에서 피천득 선생은 이렇게 글을 이어갑니다.


베이스볼 팀의 외야수와 같이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나는 좋아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스케르초(scherzo)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는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플레이어를 부러워한다.


나와 타인의 무음의 연주를 이해하고, 순서가 오면 넉넉한 유머를 품고 연주하는 사람.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휴가였습니다. 아직 갈 길이 구십구만 리지만, 지금 머무는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땐 이 글을 떠올려 볼까 합니다. 곧 시작될 추석 연휴에 마저 읽을 수필 몇 개에서도 삶을 보듬는 문장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풍성한 한가위 인사를 드리며, 박혜강 드림


* 사진은 중고로 산 필름 카메라로 담은 제주의 백약이오름입니다. <인연>을 다시 만난 인연으로 직접 찍은 제주 풍경을 올려봅니다.




PUBLY 팀이 보고 읽은 이번 주 콘텐츠


• 생각노트 - 2018: 추석 연휴의 계획들 읽어보기

올해 추석을 앞두고도 연휴 기간 해볼 것을 정리했다. 요약하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책 3권을 완독하며 유튜브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려 한다. 또한 설 연휴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블로그 뉴스레터 리뉴얼 작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 혜강: 올해 초였던 설 연휴 기간, 저는 생각노트와 함께 '도쿄의 디테일' 리포트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생각노트 블로그에 올라온 '2018: 설날 연휴의 계획들'을 보며 감탄했었는데요. 일할 때는 계획형 인간이지만, 놀고 쉴 때는 유연함의 극치를 달리는 저로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올 추석은 저도 약간의 계획을 세우고 어딘가에 올려 보거나 지인에게 말해보려 합니다.


일단, 생각노트가 추천한 넷플릭스 다큐 <돈 버는 리모델링> (관련 글은 여기)과 다른 다큐 한 편을 찾아서 볼 예정이고요. 쟁여둔 책 중 3권 정도 골라 완독하고 간단한 리뷰를 남겨볼까 합니다. 또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취미 생활에도 시간을 반나절 이상 들이려 하고, 10~12월(4/4분기) 계획을 간단하게 세워보려 합니다. 가장 중요한, 가족과 많은 시간 보내기도 물론 잊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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