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승화한 고통

by 흐르는물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인간의 모습에서 강인함과 나약함을 함께 본다. 그 순간을 극복하는 과정은 다를 수 있지만 감정의 굴곡은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공유하며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 방법의 하나가 예술이라는 범위다. 예술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아름다움과 울림으로 바꾸어준다. 회화, 음악, 춤, 문학은 고통을 새로운 의미로 승화시킨 대표적 장르다.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나 현실 탈출의 표현이기도 했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이든 사회든 고통을 감내하는 당사자는 인간 개인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 표현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예술로 승화되기도 하고 개인의 삶으로 끝나기도 한다. 어쩌면은 그것은 사실적 기록을 남기는 하나의 표현방법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고통과 슬픔을 예술이라는 시각으로 보고 듣고 함께 나눌 수 있기에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림, 음악, 문학을 통해 그 사례들을 찾아보자.


1. 그림 – 고통을 형상화하다.


뭉크의 《절규, 1893》는 개인의 불안과 고통을 강렬한 선과 색채로 담아낸 작품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게 한다. 개인의 내면적 고통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불안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강열한 시선이 관객들의 시각을 통해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공감하면서 치유의 과정을 남기기도 한다. 누구나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관객은 뭉크의 절규에서 절망만 느낀 것이 아니라 희망도 함께 보는 것이 다. 그것은 뭉크가 다른 작품인 태양을 통해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1814》은 스페인 민중이 프랑스군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것은 시대의 기록이자 인간의 악랄함과 무능력함의 고발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순간의 공포와 고통을 예술로 고발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운다. 잘못된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국가의 이익에 따라 방관자가 되어버린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전쟁은 어떤 명분을 지녔던 권력자의 사욕에 찌든 욕망의 표출이다.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누구의 권한도 될 수 없다. 역사 속의 전범일 뿐이다.


뭉크가 개인의 고통을 고야가 대중의 고통을 그림으로 드러냈다면 이중섭은 전쟁이 가져온 고통과 슬픔을 자신과 가족의 입장에서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중섭 《황소》는 전쟁과 가난, 가족과의 이별 속에서 그려졌다. 황소는 우리 국민에게 가장 친근한 동물의 상징이다. 힘과 재력을 늘려주는 가정의 든든한 지킴이자 삶의 동반자처럼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그 황소를 통해서 삶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에게 있어 황소는 그의 고통을 짊어진 존재이자, 동시에 굴하지 않는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 속에 애증과 사랑이 있다.



2. 음악 – 고통을 넘어서는 울림을 주다


베토벤은 교향곡 제9번 《합창, 1824》은 이미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완성되었지만 마지막 4악장에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도입하여 인간 극복의 승리를 보여준다. 개인의 고통을 넘어 음악을 통해 그 고통을 넘어섰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1941》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중 레닌그라드의 포위 속에서 작곡되었고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음악은 민중의 저항과 생존 의지를 담아낸 것으로 알려진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1727》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주제로 하지만, 비탄을 장엄한 합창으로 승화시켜 감동과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3. 문학 – 고통의 증언과 의미를 담아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1947>는 자신이 수용되어 겪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한 경험을 증언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타락과 존엄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빅터 위고의 <레 미제라블, 1862>은 장발장이라는 가난한 전과자를 통해 사회적 억압과 빈곤, 법과 자비를 다루며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다. 이육사의 <광야>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절망의 현실을 넘어 민족의 저항과 희망을 상징하는 시로 남았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인간이 지닌 나약함과 고통을 어떻게 떨쳐 나갈 수 있는가를 알게 된다. 개인과 사회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간이 견디고 그 순간을 뛰어넘어 미래로 갈 수 있는 희망의 길을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또 다른 희망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형상을 통해 보이는 그림이 되었던 음률을 통해 청각적인 자극으로 다가오든 한 줄의 문장을 통해 음미와 해석으로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게 하든 결국 인간이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현명한 방법으로 바로 자신의 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 공감을 통해 우리는 그 아픔도 순간의 소중함으로 간직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록과 공감은 현실을 뛰어넘는 가치로 기억되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결국 인간은 고통 속에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가치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고 음악이며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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