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기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있어 사인이 당연시 되었다. 90년대까지는 도장이 자기 증명과 확인의 대세였다면 요즘세대는 자기 사인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름 석자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인을 만들어 멋을 드러낸다. 법적으로 사인이 효력을 인정받으면서 도장이 사라지고 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연예인이나 화가 등 대외적으로 활동이 많은 사람들은 그 사인의 중요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화가의 서명(署名), 사인(Signature) 은 단순하게는 확인이면서 작품의 완성을 의미한다. 또한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외부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사인은 작품의 한 부분적인 요소로 마감되는 마지막 화룡점정이라고 할 것이다. 화가마다 자신만의 특징을 드러내는 사인을 한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며 그 작가의 사인을 보는 여유를 가져본다면 더 큰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화가의 사인은 자기 작품이라는 증명을 나타내며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는 브랜드가 된다. 그 결과 작품의 시기적 흐름과 위작 시비에 있어 사인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 변화에 따라 사인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사인을 보면 그 위치와 방법도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사인의 위치는 작품 오른쪽 아래가 가장 일반적이다. 또 작품 앞면에는 사인을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뒷면에 하는 경우도 있고 작품 옆면에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는 사인을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작품내부에 녹여내기도 한다. 사인을 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 또한 작가마다 개성이 있으나 대부분 물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판화의 경우에는 연필을 사용한다.
사인 방법에 있어서도 이름을 쓰거나 이니셜만 쓰는 경우도 있고 문자표시처럼 도형화해서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종이가 일찍 발달한 우리는 오래전부터 글이나 그림 속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호와 이름 낙관(도장)을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 음양각으로 새겨진 낙관은 다양한 모양과 글씨체, 그리고 날인하는 위치에 따라 작품 내용과 어울리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근래 우리 작가들의 사인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자와 영어, 한글, 이니셜, 도형 등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있어 그 다양성이 다른 국가의 작가들보다 높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하여 작품과 어울리는 위치에 서명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인은 독특한 필체·기호·위치 등을 통해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작품의 일부분이 된다.
파블로 피카소는 초기에는 “P. Ruiz” (아버지 성) 이후 “Picasso”를 사용했고, 빈센트 반 고흐는 Vincent’라고만 썼다. 호쿠사이는 30개 이상의 필명으로 작품 종류, 시기, 스타일에 따라 사인이 달라졌다고 하며 살바도르 달리는 크게 휘어진 장식적인 과장된 ‘Dali’ 사인을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작품 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 클림트는 글씨가 아닌 그림 같은 기하학적인 사인을, 장 미셸 바스키아(Basquiat)는 왕관(皇冠) 기호를,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강아지(Haring Dog)와 사람 픽토그램을 사용하였으며 뱅크시(Banksy)는 본명 대신 그라피티 태그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인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하게 변형되고 그 상징성을 드러내는 존재로 발전해 가고 있다.
화가들의 사인 역사는 르네상스(14~16세기)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후 작가의 창작성을 드러내는 의미로 사용된듯하다. 우리의 경우에도 조선 초기 까지지는 불화(佛畵)나 궁중 화원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서명이 없으며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관지(작가가 글씨나 그림에 자신의 이름이나 아호(雅號)를 쓰고 도장을 찍음)와 낙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사인이 사용된 시기는 1900년대 초 서양 유화가 도입되면서 일본 유학파, 유화 작가들이 서양 형식의 사인을 도입하여 국문과 한문·영문 사인이 혼용되어 이름을 직접 쓰는 방식이 처음 등장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인이라는 것은 초기에는 단순한 소유 표시로 사용되다가 현대에 와서는 작가의 정체성, 철학과 태도 등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술 행위로 확장되었다. 예술가 자신의 개성·태도·철학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림을 볼 때 작가의 사인을 함께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이 될 것이다. 개성 넘치는 자기만의 표현을 통해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사인이 어떻게 변화되어 나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