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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비판과 허무

바니타스, 공수래공수거

by 흐르는물

정물을 그린 작품에는 꽃도 있고 물건도 있고 동물도 있고 정말 예쁘게 그린 것도 있고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린 작품도 있다. 그런 것에서 느낌은 대부분 좋다 아니다 하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 정물을 통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7세기 유럽의 정물화는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것을 ’ 바니스타 vanitas 회화‘라고 한다.


바니스타 vanitas는 '공허, 헛됨, 가치 없음'을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의 관점으로 세속적인 물건과 일시적이고 무가치한 것을 추구하는 걸 뜻한다. 이런 회화는 17세기 북유럽과 독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그 배경은 바로 당시의 유럽이 보여주는 어두운 상황 때문이다. 14~19세기까지 지속된 흑사병, 1562~1598년 지속된 프랑스 종교전쟁, 1618~1648년까지의 30년 종교전쟁, 1567~1648년까지 80년간 지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등으로 유럽은 처절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바니타스 그림에는 죽음을 상기시키는 두개골, 썩은 과일, 거품, 연기, 시계, 악기 등이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권력과 재물, 배움, 쾌락 등은 의미가 없다는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메시지를 담았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처럼 재물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무언가 바뀌어야 할 것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 이런 목소리가 더 커질 때 사회는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바니스타, 공수래공수거는 허무주의와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 것이다. 우리는 어려울수록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게 된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멈출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방향성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 사회가 지닌 다양한 문제를 보면 과연 내 미래는 어떨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고 때로는 자포자기하면서도 현재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 한다. 그것은 주변을 다시 둘러보게 되고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 지금 내가 지닌 것에 대한 가치를 다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소유와 비움을 생각하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방향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하고 그 실천을 이끌어내는 시점은 바로 자신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재 분석이다.


결국 내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내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바로 바니스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의식해서 샀던 물건, 커다란 집, 영원할 것 같은 권력, 외모지상주의, 학벌 등은 주변을 의식한 왜곡된 시선과 편견일 수도 있다. 그림 속 정물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대상을 자세히 들여보면 썩고 부패하고 하나의 고철에 불과할 뿐인 것들은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며 어느 순간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는 의식을 깨닫게 만들어준다. 작가는 세상에 대한 허무함을 표현했지만 그 그림은 하나의 계몽적 의미를 내포 함으로써 관객을 대상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직접적으로 배우는 하나의 가치다. 그림은 다양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사물로 표현하여 드러낸 객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 현상을 이해하게 된다.


Still Life with Dead Game, Fruits, and Vegetables in a Market, 1614, Frans Snyders
Still Life, 1625, Pieter Claesz


* 사진 : 시카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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