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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Nov 09. 2022

마법의 앞치마

집안일, '의무'에서 벗어나기- "오늘부터 앞치마를 입겠어요."

지현은 서랍을 열고 앞치마를 꺼내 들었다. 동그란 모양의 끈을 경건한 마음으로 목에 두르고 두 개의 끈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허리 뒤로 리본을 묶었다. 보이지 않지만 최대한 정성을 쏟았다.

문득  3년 전 자신을 떠올렸다. LA 여행 중 들렀던 게티센터 기념품 가게. 지현은 문구류를 한참 동안 구경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가지런히 걸려있는 앞치마를 보았다. 둥그스름하고 길쭉한 잎들이 시원하게 펼쳐진 초록빛이 싱그러운 앞치마였다. 아래쪽에 블루베리인지 포도인지 헷갈리는 보라색 열매도 보였다. 지현은 이내 앞치마를 두른 자신을 상상했다. 이 앞치마라면 주방과 조금 더 친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옷걸이에 걸린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 "엄마, 이제 나갈래~"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지현은 짧은 망설임을 끝내고 똑같은 앞치마를 하나 챙겨 계산대로 향했다.

지현은 유튜브를 켜고 '아침 힐링 음악'을 검색했다. 잔잔한 피아노 음악과 새소리가 들리는 영상을 고르고 여기저기 갈 길을 잃은 물건들로 어지러운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순간, 지현은 입고 있는 앞치마에 신기한 힘이 있다고 느껴졌다. 평소의 지현이라면 두 아이를 등원시킨 후 집 정리하는데 쓰는 시간이 아까워 후다닥 바삐 몸을 움직이고 덩달아 마음이 쫓겼다. '아, 집에 물건이 너무 많아. 다 버리고 싶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해치우듯 물건들에게 다시 제 자리를 찾아주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지현은 조금 달랐다. 수건을 접을 때도 평소보다 반듯하게, 손끝에 여유를 담았다. 빨래를 다 개고 옷 방으로 향했다. 앞치마를 입지 않았던 평소의 지현이라면 어땠을까. 종류별로 서랍에 넣는 일이 귀찮아 서랍 위에 툭 올려두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한 듯이 쉽게 만족했다. 하지만 오늘의 지현은 달랐다. 아이 옷, 남편 옷, 가지런히 제 자리를 찾아주었다. 서랍을 닫고 돌아서는 지현이 거울에 보였다. 앞치마를 입은 자신이 낯설지만 제법 괜찮아 보였다.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조금씩 경쾌하게 바뀌었다. 바닥에 흩어진 아이들의 책을 주워 올리는 팔이 가벼웠다.

오늘 아침 앞치마를 입기로 한 선택은 지현에게 새로운 생각을 데려왔다. 스스로 앞치마를 두른 순간, 눈앞에 '주부로서 해야 할 일'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 손길이 필요한 일'로 다가왔다. 물건들이 제 위치로 가는 사이 지현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뽀그르 새어 나오는 뿌듯함을 입가에 얹고 주방으로 갔다. 앞치마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 요리랄 것도 없지만 지현은 자신만을 위한 늦은 아침을 준비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폴란드 산 라테 잔을 꺼냈다. 사과를 깎아 한 입 크기로 썰고 로즈바나나도 예쁘게 썰어 커다란 머그컵에 넣었다. 아보카도도 조금 추가하고 꾸덕한 그릭 요구르트를 부었다. 그 위로 그래놀라 한 주먹을 골고루 뿌려주었다. 보태니컬 풍의 커피 잔을 준비하고 다즐링 티백 봉지를 뜯었다. 80도의 뜨거운 물이 졸졸졸... 다즐링 향이 퍼진다. 지현은 앞치마를 벗어 잘 보이는 곳에 걸쳐 두었다. 자, 이제 글쓰기를 시작하자. 오늘은 앞치마에 관한 글을 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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