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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Jun 25. 2024

갤러리에 가는 것도 좋고.

[안녕하세요? 일산 최도령 법당입니다. 000님 차례가 되어 연락을 드립니다. 주중, 주말 중 원하시는 때를 말씀해 주시면 안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최도령 매니저 000-

 작년에 내가 이 안내 문자를 확인하던 순간 나는 그로부터 1년 6개월 전쯤의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살면 많은 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건지,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듯한 시간 속에 갇혀 답답해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있어서 점 비슷한 거라고는 지금의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때 우연히 합정역 거리를 지나다 들어선 카페에서 만난 타로카드가 전부인데, 그런 내가 나의 막연한 미래에 대해 누군가 대신 떠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 끝에 눈에 들어온 단어는 일산 최도령이었다. 나는 어느 댓글에 누군가가 두고 간 친절과 함께 남겨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예약을 하려는데요...

-네, 성함과 번호 남겨주시면 예약 순서 때 연락드릴게요. 1년 8개월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진행해 드릴까요?

-네? 아... 네 해 주세요.     


 그렇게 나는 일단 내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두었고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에 문자를 받았다. 연락을 받은 때는 이미 새로 이사한 곳과 가까운 곳으로 복직을 하게 되어 바쁘게 지내던 터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많이 사라졌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예약을 하던 때의 절박한 심정이 아니었기에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그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에 차분하게 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곳이 너무나 궁금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예약할 당시의 내가 갈구했던 필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동네 마사지 샵 원장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던 어느 날, 원장이 내게 분위기가 독특한 한 남자 고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늘 화려한 장신구를 여러 개 하고 고다이바 초콜릿을 두 손 가득 가져온다고 했다. 원장은 그 고객이 '최'씨 성을 가지고 있어 아무래도 그 유명한 최도령인 거 같다는 추측을 내비쳤다. 그 후로 한 달 뒤, 나는 예약 날짜를 받았고 안내받은 주소가 그 마사지 샵이 위치한 상가의 아파트임을 확인했을 때 원장의 추측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벚꽃이 흩날리는 4월의 어느 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최도령을 만나러 갔다. 집 안에 들어서니 매니저로 보이는 한 남자가 거실 중앙의 자리로 안내를 해 주었다. 소파 끝에 걸치고 앉자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인터넷에서 미리 본 사진 속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고풍스러운 고가구들이 거실을 채우고 있고 곳곳에 크고 화려한 장식품들이 보였다. 호흡이 조금 편안해졌을 때쯤, 좀 전의 남자가 손에 머그 잔과 접시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금색 띠를 두른 하얀색 도자기 접시에 담겨있는 건 다름 아닌 고다이바 초콜릿이었다.     

     

 나는 질문거리를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한 남자가 맞은편 방에서 나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매니저의 안내를 받고 나도 그 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에 한쪽 벽면 가득 법당에서 볼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남자 맞은편에 놓인 의자가 내가 앉을자리였다. 곰돌이가 크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최도령은 30대 중반에서 관리가 잘 된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원장의 말대로 하얗고 통통한 동그란 얼굴이었다. 관리를 받으러 올 때 명품 팔찌를 세 개씩 양팔에 두르고 온다는 원장의 말이 생각났다. '원장님, 원장님 추측이 맞아요!' 혼자 딴생각에 빠진 순간 최도령은 중간에 구멍이 있는 동전을 여러 개 손에서 흔들더니 테이블에 촤르륵 던졌다. 그는 빈 종이를 끌어와 눈을 반쯤 감고서 낙서인 듯 아닌 듯 아주 빠른 손동작으로 종이 위에 펜을 갈겨대며 무언가를 그려댔다. 그리고 펜을 놓았다.       

   

 나는 순간 호흡을 멈추고 잠시 침묵에 잠긴 그를 보았다. 이내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이야기했는데 그의 발음이 정확하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익숙한 내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현재 나를 둘러싼 삶과 내가 누려야 할 삶에 대해서 그는 마치 랩을 하는 사람 같았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해, 나의 직업에 대해, 나의 슬픔에 대해.. 순간 나는 눈물이 터졌고 속사포랩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최도령은 티슈를 뽑아 나에게 건네는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최도령은 내가 어떤 취미를 가지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는데 이 점이 정말 흥미로웠다.

"영어해? 영어도 좋은데 스페인어를 해봐. 스페인어 잘할 거야..... 복지.. 노인 복지 이 쪽이 좋은데 또 너무 마음 쓰는 스타일이라 안 되겠어. 미술, 예술 쪽 재능이 세. 상담도 좋고. 색채심리 쪽도 공부하면 좋고. 시간 날 때 갤러리 가는 것도 좋고. 따라 그리는 그림이라도 좋아. 그림을 그려. 영상편집 이쪽도 좋은데 컴퓨터 쪽은 안 맞으니 이건 패스."          


 평소 나는 갤러리에 혼자 가서 아무 작품 앞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로운 하루가 허락되는 일상을 언제나 꿈꿔왔다. 하지만 현실은 여행 중에 쫓기듯 둘러보거나 관심 있는 전시회 일정을 확인하고도 거리를 핑계로, 시간을 핑계로 갤러리로 향하는 하루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올해 5월의 어느 날, 메타버스 플랫폼인 이프랜드에서 친한 언니가 진행하는 온라인 갤러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언니와 친분이 있는 화가의 다가올 전시회 일정을 홍보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평소에 언니로부터 작품 얘기를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주 후 나는 혜화아트센트에서 그동안 온라인에서 목소리로만 소통했던 작가님을 만났다.          


 최근 인기 있는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여주인공 집에 걸린 작품처럼 작가가 그려낸 꽃잎은 질감이 두텁게 표현되어 작품을 감상하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빛이 살아났다. 전시된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작가가 직접 여행 중에 모은 보석과 원석을 오브제로 사용하여 입체적인 해바라기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매력적인 작품들의 행렬 가운데 가장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두 점 있었다. 하나는 그림 속에 작게 쓰인 "What happened to you?" 문구가 담긴 심슨과 캣우먼의 콜라보한 듯한 섹시한 포즈의 여자가 중앙에 있는 작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 희망을 상징하는 하얀색 해바라기 꽃병에 금속 열쇠가 붙어있는 작품이었다.     


 두 시간 동안 작품들을 보고 또 보며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림 두 점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로 마음에 든 그림의 전체적인 톤은 어둡고 침울했지만 그림 속 여자의 분위기는 담담하면서도 당차고 자신감 있는 느낌이었다. 특히 그림 속 인물이 한 손에 들고 있는 하트가 마음에 들었다. 'Love always wins.' 내가 굳건하게 믿고 살아가는 나의 신념이 담긴 것 같았다. 두 번째로 구매를 결정한 그림에서 본 낡은 열쇠는 마치 식물의 뿌리 같아 보였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사람이 있는데 내가 애정하는 작가님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자기 외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마세요. 답은 모두 내 안에 있거든요. 꽉 찬 냉장고를 열고 요리를 시작하세요." 나는 이 그림을 집에 걸어두고 아름다운 꽃의 뿌리를 닮은 금속 열쇠 하나를 자주 보며 내 안의 힘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것이 된 그림 두 점 옆에 빨간색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졌다. 나는 기념 촬영을 하고 기분 좋게 그림 값을 보냈다. 나는 작가에게 기분 좋게 소비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일주일의 전시회가 끝나고 장항동의 한 카페에서 다시 작가님을 만났다. 그녀는 그림 속에 부착한 갖가지 물건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림을 차에 싣고 오는 내내 만족스럽고 흐뭇한 웃음으로 내 배꼽 주변이 간질거렸다. 큰 그림 두 개와 작가가 선물한 작은 그림 두 개를 들고 나타나는 나를 본 남편은 깜짝 놀라며 그림 값을 물었다. 

"두고 봐, 이 그림은 이제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될 거니까."

1년 전 나는 1년 후 내가 그림을 사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유일하게 했던 나의 요청은 바로 방이나 거실 한쪽 벽면을 갤러리처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천장에 나란히 설치된 갤러리용 조명들이 이제 곧 빛을 발할 차례이다.

"자기야, 여기다! 여기에 그림 걸면 되겠다.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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