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상상한다. 갤러리에 혼자 가서 아무 작품 앞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나를. 오늘 상상이 나를 데려가 준 곳은 안국동의 공예박물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걱정 없는 하루일 것이다. 상상 속에서 나는 박물관에 전시된 장신구를 보며 스치는 바람처럼 오고 가는 수많은 딴생각들을 마음껏 허락한다. 화려한 목걸이라라도 좋을 것이고 심플한 매력이 돋보이는 팔찌여도 좋겠다. 나는 그 장신구를 가만히 보다가 그것을 가졌을 만한 어느 여자의 하루를 상상할 것이고 그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데려올 것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빨대를 쪼록 빨며 상상 속의 여자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간다. 끝이 나지 않는 긴 이야기를...
"아아 한 잔이요."
둘째 아이를 등원 버스에 태워 보낸 후 에어컨 바람을 쐬러 카페테리아에 들어왔다. 어수선한 거실, 지저분해진 아침 식탁을 치울 일은 잠시 미뤄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반 이상 쪼르륵 빨아 당겼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오늘 일정표를 보았다. '2시 태양이 치과 검진, 3시 30분 햇살이 수영 체험수업'. 관심 있는 전시회 <장식 너머 발언>에 가려던 날이기도 했다. 집을 정리하고 나면 서둘러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짬을 내어 전시회를 가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5월의 어느 날, 메타버스 플랫폼인 이프랜드에서 H언니가 진행하는 온라인 갤러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H언니와 친분이 있는 화가의 다가올 전시회 일정을 홍보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평소에 언니로부터 작품 얘기를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 반가웠다. 2주 후 나는 혜화아트센트에서 그동안 온라인에서 목소리로만 소통했던 작가님을 만났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여주인공 집에 걸린 작품이 있나 궁금해하며 나는 갤러리 입구부터 차례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가가 그려낸 꽃잎은 질감이 두텁게 표현되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빛이 살아났다. 전시된 작품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작가가 직접 여행 중에 모은 보석과 원석을 오브제로 사용하여 해바라기 꽃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온라인에서 미리 본 작품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를 붙잡아 두는 그림이 있었다. 하나는 심슨과 캣우먼의 콜라보해서 탄생한 섹시한 포즈의 여자가 중앙에 있는 작품이었다. 그림 제목은 <캣우먼 마지>였다. 콜라주기법으로 붙인 문구가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What happened to you?"
묘하게 위로를 건네는 한 마디였다. 전체적인 톤은 어둡고 침울했지만 그림 속 여자의 분위기는 담담하면서도 당차고 자신감 있었다. 특히 그림 속 인물이 한 손에 들고 있는 하트가 마음에 들었다.
'Love always wins.'
내가 굳건하게 믿는 나의 신념이 담겨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하얀색과 살구빛 해바라기가 58cm의 캔버스를 가득 차지한 그림이었는데 짙은 에메랄드빛과 갈색빛의 꽃병이 신비로운 색감을 뽐내는 작품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하얀 해바라기>였다. H언니의 말에 따르면 작가가 얼마 전 언니와 함께 타히티에 다녀온 이후 즐겨 쓰고 있는 색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타히티의 신비로움이 그림에 담긴 듯했다. 꽃병 아래에는 다양한 크기의 원석들이 함께 놓여있었는데 마치 뿌리가 얽혀있는 듯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중앙에 놓인 꽃병 아래에 붙어있는 금속 열쇠였다. 그 순간 나는 애정하는 P작가님의 말이 떠올랐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자기 외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마세요. 답은 모두 내 안에 있거든요. 꽉 찬 냉장고를 열고 요리를 시작하세요."
나는 이 그림을 집에 걸어두고 아름다운 꽃의 뿌리를 닮은 이 금속 열쇠를 자주 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일상에서 찾은 작은 발견의 순간들을 글로 남기며 글쓰기가 가진 힘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 개의 그림을 샀다. 내 것이 된 그림 두 점 옆에 빨간색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었다. 기념 촬영을 하고 기분 좋게 그림 값을 치렀다. 나는 작가에게 기분 좋게 소비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세상에, 내가 그림을 사다니. 어색하고 쑥스러우면서도 꽤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기분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일주일의 전시회가 끝나고 장항동의 한 카페에서 다시 작가님을 만났다. 그녀는 그림에 부착한 갖가지 물건들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림을 차에 싣고 오는 내내 만족스럽고 흐뭇한 웃음이 내 배꼽 주위를 간질거렸다.
나는 큰 그림 두 개와 작가가 선물한 작은 그림 두 개를 두 번에 나누어 들고 집에 들어왔다. 나를 본 남편은 깜짝 놀라며 그림 값을 물었다.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말해 봤자 좋은 소리 듣기를 기대하긴 힘들터였다. 나는 남편의 질문에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단단한 목소리로.
"두고 봐, 이 그림은 이제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될 거니까."
나는 크고 작은 네 개의 액자를 혼자 들고서 안방 드레스룸으로 옮겼다. 당장 그림들을 어디에 걸지 결정하기 어려워서였기도 했지만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용기를 모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나 아이들이 모두 외출하고 없는 주말 낮이었다. 나는 미리 와이어 액자걸이를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 1년 전 나는 1년 후 내가 그림을 사게 될 것을 알았을까?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유일한 나의 요청은 바로 방이나 거실 한쪽 벽면을 갤러리처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천장에 나란히 설치된 갤러리용 조명들이 이제 곧 빛을 발할 차례다.
"자기야, 여기다! 여기에 그림 걸면 되겠다. 부탁해"
나는 들뜬 마음으로 남편에게 액자를 걸어달라 요청했다. 남편은 예상대로 툴툴거리긴 했지만 어느 벽이 좋을 지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거긴 별로지! 차라리 이 쪽 벽면이 하얀 벽지라서 더 낫지."
남편이 제안한 벽에는 갤러리용 조명이 없었지만 내가 봐도 그쪽 벽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 거실 텅 비어있던 벽에 그림 네 점이 걸렸다.
그림이 자기 자리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남편은 출장을 떠났고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줄 친정 엄마가 와 주셨다. 지난 5일간 같이 있는 내내 그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시던 엄마가 복숭아를 깎다 말고 말했다. 마음껏 솔직하기로 작정을 한 사람처럼.
"저기 저 그림 있제, 그거 그림도 아닌 거 같다. 너무 조잡하고 말이야. 그림은 좀 그림 같은 맛이 있어햐 하는데 이건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네가 이거 얼마를 준 건지는 몰라도 100만 원 넘어 샀으면 너 완전 잘못 산거다. 솔직히 얼마 줬니?"
나는 조잡하다는 말에 일부 동의를 하고 있는 내 속마음을 깨닫고 놀랐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엔 보석이랍시고 뭐가 잔뜩 붙여져 있는 게 좀 인위적이고 복잡해 보이긴 했거든."
나는 조금 흥분하려 하는 나를 빠르게 달래고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엄마, 내가 이 그림을 사려고 마음먹은 강력한 이유가 있으니 나한테는 그걸로 충분해."
엄마는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림이 그림 같아야지. 잡다한 거 다 붙여가지고 애들 장난친 거 같구먼. 저런 걸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니?"
역시 오여사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는 마음이 휘청대지 않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한테 이런 작품은 그림 같지 않구나? 엄마 취향 그림은 어떤 걸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다음에는 우리 갤러리 데이트를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엄마는 복숭아를 베어 물다 말고 또 물었다.
"그래서 얼마 줬는데?"
"그건 나만 알고 있을 거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나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나는 너무 좋아. 그 기분이 너무 소중해. 그래서 망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 안 할 거니까 더 이상 묻지 마요."
나는 좀 전의 엄마의 말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귓가에 맹맹 거리고 있어서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림이 나에게 건네는 말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캣우먼 마지>가 말한다.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결국 사랑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거야. 그걸 믿어."
<하얀 해바라기>가 말한다.
"기억해. 네가 찾고 있는 모든 것은 바깥에 있지 않아. 모두 네 안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