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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yd 고종석 Jul 16. 2019

50주년 맞이한 Woodstcock Festival

음악 페스티벌 이야기

음악이 지닌 매력은 감상의 방법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사람과 함께 특정 음악의 감상을 이룰 때 이전에 느꼈던 재미와 흥미는 평소보다 더해질 때가 많다. 확실히 다수가 모여 공통된 음악을 즐기는 감상회와 같은 자리는 평소보다 더한 감흥을 전한다. 또한 몇 배수에 이르는 보다 많은 인원이 야외에 모여 라이브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페스티벌의 경우에는 감상의 정도가 극대화됨은 물론 전율스러운 감동마저 전달한다. 오늘의 이 글은 전설적인 음악페스티벌로 기록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국내 음악 페스티벌의 흐름과 해외 음악 페스티벌의 시작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는다. 



국내 음악 페스티벌과 록페스티벌의 흐름 


페스티벌과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여름이라 할 수 있다. 찌는 더위와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관객의 즐거움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음악과 관련된 페스티벌은 유독 여름에 많이 열린다. 페스티벌은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의미한다. 페스티벌이 지닌 의미로 따지자면 과거 대중가요계에서 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담당했던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와 같은 가요제 역시 페스티벌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역사에도 페스티벌의 흔적은 발견된다. 1969년 516군사혁명에 대중적 지지를 유도하고자 기획되었던 ‘516기념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열렸으며, 이 경연대회에는 무려 4만 여 명의 관객이 몰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뒤를 잇는 국내 페스티벌의 역사는 전 세계 페스티벌의 교과서로 인식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Music&Art Fair)’와 흡사한 기운에서 시작되었다. 1971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던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여러 포크 뮤지션들이 주축을 이루며 청평에서 열린 무대가 바로 그 기록이다. TBC라디오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신광철PD가 기획했던 이 공연은 197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향후 등장했던 여러 가요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 해외 대형 록페스티벌(이하. 록페)와 흡사한 시스템으로 페스티벌이 정착한 시기는 대략 2010년을 전후로 한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15년 전의 시점에 유사한 흐름을 보인 자유 콘서트가 존재한다. 인디 문화가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 지역 대학 내 노천극장에서 진행되었던 자유 콘서트는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로 분류되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1999년 국내 최초의 록페로 기록된 트라이포트 록페가 절반의 성공을 거두며 음악 페스티벌은 대중과 마니아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원활한 길목에 접어들 수 있었다. 뒤를 이어 인천의 펜타포트 록페와 부산의 국제 록페, 동두천의 동두천 록페(소요산 록페), 광명 음악벨리축제처럼 2000년대 초반에 연출된 국내의 록페는 지역을 상징하는 행사로 자리를 잡으며 성장해 나왔다. 


또한 쌈지 사운드페스티벌과 그린 플러그드, 그랜드 민트, 뷰티풀 민트라이프와 같은 특정 브랜드와 기획사가 주도하는 페스티벌이 등장했고, 뒤를 이어서 지산 록페와 벨리 록페, 시티 브레이크와 같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페스티벌과 GMF,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서울 재즈페스티벌과 같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페스티벌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3~4년 사이에 록페의 흥행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니아 입장에서는 흥행요소가 부족한 라인업과 장르 안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구성에 큰 불만을 보였기 때문이며, 일반 대중의 경우 겹치는 라인업과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기획에 흥미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럼에도 지난 1~2년 사이에 국내 록페는 부족했던 요소들을 채우는 새로운 페스티벌이 조금씩 등장하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올해에만 스트라이퍼(Stryper)와 자도닉(Zardonic) 등을 앞세운 전주 JUMP뮤직페스티벌과 스트라토바리우스(Stratovarious)와 본 오브 오시리스(Born Of Osiris) 등 묵직한 라인업으로 구성된 강원 록페가 대중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일편 20회를 맞이하며 유료화를 선언한 부산 록페를 향한 질타가 만만찮은 기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명맥을 유지한 펜타포트 록페에 이르기까지 2019년 진행될 록페는 그 어느 해보다 무난하게 흥행을 이룰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록페스티벌의 시작점에 주효했던 
Monterey와 Woodstock


전 세계 음악 페스티벌의 시작점은 1967년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의 존 필립스(John Phillips)와 레코딩 프로듀서이자 프로모터였던 로스 애들러(Los Adler)가 기획한 몬트레이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Music Festival)에서 찾을 수 있다. 타이틀에서 드러나듯 이 페스티벌은 인도의 라비 샹카(Ravi Shankar)와 캐나다의 파우퍼스(The Paupers),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휴 마세켈라(Hugh Masekela) 등 여러 국가의 뮤지션들을 초대해서 출연진이 구성되었다. 또한 신인급으로 분류되었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등의 뮤지션들이 대형 아티스트로 거듭난 계기를 마련한 페스티벌이었다. 특히 지미 헨드릭스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에 불을 붙이고 바닥에 내리찍는 퍼포먼스를 통해 그 어느 뮤지션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1967년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위치한 몬트레이 컨트리 페어그라운드에서 열린 몬트레이 페스티벌에는 총 33개 팀이 참여했다. 낮과 밤을 이어서 라인업을 구성했으며, 각각의 마지막 날 무대에는 헤드라이너가 라이브를 펼치며 페스티벌의 상징적인 요소를 제시했다. 페스티벌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현장의 들뜬 소문을 접한 수많은 히피가 뒤늦게 유입되었는데, 마마스 앤 파파스의 마지막 무대가 펼쳐지던 시점에는 10만 여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무대에 오른 스콧 맥킨지(Scott Mckenzie)가 열창한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는 몬트레이 페스티벌은 물론 음악과 사랑, 꽃으로 대변되던 히피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우드스탁 페스티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지구촌의 음악 페스티벌을 상징하며 아직도 끊이지 않고 회자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여러 면에서 록페의 개념을 장착시킨 몬트레이 페스티벌과 유사한 틀을 지니며 기획되었다. 다양한 장르와 영미를 제외한 국가의 여러 뮤지션이 무대에 올랐다는 점은 물론 광활한 야외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두 페스티벌은 흡사한 부분이 발견된다. 그리고 두 페스티벌의 동일한 슬로건은 국가적으로 힘을 과시하던 미국에게 인종차별과 반전이라는 화두를 음악으로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시사했던 바가 컸다. 


몬트레이 페스티벌과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시작과 확장이라는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시대적 환경에 의한 차별적인 부분도 발견된다. 두 페스티벌이 열린 시기 사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크게 떨어졌으며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고 있었다. 아울러 우드스탁 페스티벌로 성스럽게 타오르던 히피 문화의 불꽃이 페스티벌 직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으로 급격히 시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몬트레이 페스티벌에서 발견되었던 운영과 운집의 부분적인 허점을 넘어서는 결과를 이끌었다. 5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몰렸으며 불과 2년 전에 신인으로 분류되었던 몇몇 뮤지션들이 최고조의 연주를 펼치며 현장의 분위기를 전율스럽게 이끌었다. 또한 포크를 중심으로 라인업이 형성되었던 몬트레이 페스티벌과 달리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블루스, 펑크, 소울, 서던록, 싸이키델릭록, 하드록 등 여러 장르의 다양한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최상의 페스티벌로 기록될 수 있었다. 



Woodstock Festival 등장의 배경




1. 히피의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1969년 미국은 내부적으로 정치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월남전도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탈사회적 의식과 행동을 하던 샌프란시스코 지역 청년들로부터 파급되기 시작한 히피 문화는 몬트레이 페스티벌에서 자신들의 결집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전과 사랑, 평화를 외쳤던 히피는 약물과 음악에 취해 정작 현실에서 도망치듯 안위적인 행동을 보이기 일쑤였다. 급기야 기성세대와의 충돌과 대립 속에서 수많은 히피들은 몬트레이 페스티벌과 같은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히피 무리가 다시 한 번 응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미국 순회공연 중이던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열기를 잇고자 진행했던 알타몬트 공연을 계기로 히피는 주류 문화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무대 경호를 맡았던 헬스 앤젤스(Hell's Angels) 단원이 관객 중 한 명을 현장에서 살해한 것과 무질서한 히피들의 관람 문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 여러 계층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이 필요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획한 4인 중 한 명인 마이클 랭(Michael Lang)은 1968년 5월 플로리다에서 진행된 마이애미 팝페스티벌(Miami Pop Festival)을 개최하며 대형 음악페스티벌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떠나서 히피와 기성세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던 마이클 랭은 존 로버츠(John Roberts), 조엘 로젠먼(Joel Rosenman), 아티 콘펠트(Artie Kornfeld)와 함께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본격적으로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우드스탁 벤처(Woodstock Ventures Inc.)라는 회사까지 설립한 네 사람은 페스티벌의 타이틀로 홍보를 시작했던 ‘Woodstock’을 그대로 사용하며 행사 장소를 뉴욕 베델 평원으로 최종 결정했다. 


3일 동안 5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들어 팝음악의 역사를 바꿨던 베델의 당시 지역민은 3천명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몰려든 인파에 지역민은 물론 관객들 모두 먹고 자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3일 동안 관객들이 보인 자생적인 생활 방식 속에서 질서 있게 행한 관람 문화는 한동안 페스티벌을 즐기는 지침으로 활용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한 33개 팀 가운데 컨트리 조 앤 더 피쉬(Country Joe and the Fish)와 제퍼슨 에어플레인, 라비 샹카, 더 후(The Who),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 캔드 히트(Canned Heat) 등 8개 팀은 몬트레이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던 뮤지션이었다. 이 가운데 재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는 새로운 밴드 멤버로 라인업을 구성해서 우드스탁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고, 실력 있는 신인들을 캐스팅해서 라인업에 포함하는 등 기존 페스티벌과의 차별성을 확고히 했다.  





절대적인 기록과 상징성을 남긴 
Woodstock Festival이 지닌 의의 


1. 음악적 변화감에 대응한 록페스티벌

1960년대 말은 그 어느 시기보다 음악적인 변화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야드버즈(Yardbirds)와 크림(Cream)을 이어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블랙 사바쓰(Balck Sabbath), 딥 퍼플(Deep Purple),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의 영국 밴드들은 미국 시장을 빠르게 잠식시켜 나가고 있었다. 또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기획되던 시점에 최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비틀즈(The Beatles)는 해체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미국 역시 서던록과 싸이키델릭을 중심으로 새로운 맹주들이 등장하면서 음악 씬 전체는 변혁의 회오리가 크게 불어 닥치고 있었다. 이를 숙고한 우드스탁 벤처는 이전의 페스티벌과 차별성을 지닌 다양하고 풍성한 라인업을 광활한 평야 지대에 무대를 설치했다. 미디어와 관계자들의 우려와 달리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악천후와 부족한 물자 속에서도 반전을 이루며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2. 히피에게 마지막 희망을 안긴 페스티벌

물질문명에 항거하고 베트남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히피의 이상은 아름다웠다.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인간성을 중시했던 히피는 문화와 예술을 즐겼으며 자유분방한 의상과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히피의 집단 난교와 약물에 찌든 생활은 일반인들의 거부감을 피할 수 없었고, 히피는 미국 사회 내에서 이방인처럼 내몰리고 있었다. 일편 인도와 일본을 여행하며 동양종교와 철학을 익힌 히피들은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합류하며 정치적 이데아를 표출하기도 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이러한 히피의 이상이 현실로 구현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교차했다는 의미를 지닌 현장이었다. 33개 팀이 무대에 오르는 동안 관객 모두가 함께 열광했고 질서 있는 생활을 보여줬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다른 생각과 방식을 지닌 이들도 음악을 통해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3. 홍보와 판매, 운영이 시스템화 된 첫 페스티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우드스탁 벤처의 경영 방식에 의해 기획되었다. 존 로버츠와 조엘 로즈먼은 페스티벌 광고와 홍보를 담당했고, 아티 콘펠트와 마이클 랭은 출연진 섭외와 각 무대의 운영과 관련된 전반을 총괄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3일짜리 티켓은 예매 가격이 18달러, 현장 구매 가격은 24달러로 운영되었다. 예매의 주된 창구는 공연장으로 직통하는 뉴욕 시내 곳곳에 위치한 레코드 가게와 라디오 방송국의 사서함을 통해 판매되었다. 가격은 지금과 비교했을 때 합리적인 가치를 지녔고, 티켓의 구매자는 히피에 국한되지 않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중산층과 청년층도 포함되었다. 신문과 라디오 광고 위주로 진행되었던 홍보를 통해 페스티벌 이전에 18만 6천여 장의 티켓이 판매될 정도로 성공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페스티벌이 시작되고 갑자기 쏟아진 폭우는 무대는 물론 베델 평야 전 지역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에 오전부터 티켓을 구매하지 않은 노숙자와 동성애자, 미국 전역의 히피들이 유입되며 현장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까지 초래되었다. 결국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우드스탁 벤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무료 공연으로 선언하며 현장의 분위기는 새로운 분위기로 고조되었다. 




4. 대형 신인들의 신들린 향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음악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고, 행위 예술과 서커스, 마술, 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포함해서 진행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첫 무대는 포크 뮤지션 리치 헤이븐스(Richie Havens)에 의해 열렸다.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열정적인 공연을 펼쳤다. 무엇보다 흑인 영가를 즉흥적으로 편곡해서 열창한 ‘Freedom’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물론 라이브 역사상 손꼽히는 무대로 기록되었다. 2013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리치 헤이븐스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우드스탁이 열렸던 베델 지역에 비행기를 통해서 뿌려졌다. 


이튿날을 대표하는 무대는 산타나(Santana)로 회자된다. 앨범 한 장도 선을 보이지 않았던 산타나의 출연은 주최 측의 과감한 선택으로 결정되었다. 데뷔 앨범 [Santana]가 발표되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 더위가 절정에 이른 2시부터 무대에 올랐던 산타나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공연을 지켜보던 관객들을 45분 동안 광란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특히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다큐멘터리에 하이라이트로 매번 등장할 정도로 감동어린 장면이 연출된 ‘Soul Sacrifice’는 각 포지션이 기계처럼 돌아가며 어울린 연주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고 말았다. 이 날 무대에 올랐던 산타나의 드러머 마이클 시리브(Michael Shrieve)는 스무 살의 나이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뮤지션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의 출연자로 기록되었다. 


역사상 그 어느 라이브보다 열정적인 보컬 퍼포먼스를 선보인 조 카커(Joe Cocker)는 우드스탁 페스티벌 3일째 날 오후 2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연주를 펼쳤다. 조 카커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리기 3개월 전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데뷔 앨범의 홍보 차원에서 이미 뉴포트 록페와 덴버 팝페스티벌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조 카커의 실력과 인기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통해 만개할 수 있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첫 무대에서 조 카커가 선보인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의 영상은 지금에 봐도 전율스러운 감흥을 전한다. 




2008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린 베델에는 우드스탁을 기념하는 베델 우즈 박물관(The Museum at Bethel Woods)이 개관되었다. 이 박물관은 우드스탁 페스티벌 현장의 기록은 물론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지닌 상징성과 관련된 기획전시가 매우 인상적이다. 개관 이후부터 이 박물관에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무명으로 무대에 올라서 최상의 연주를 펼치며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성장한 산타나는 당시의 기록물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쏟았었다. 또한 임신 중이었음에도 첫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던 존 바에즈(Joan Baez)는 중년이 된 당시 뱃속의 아들과 함께 방문하며 감격스러운 미소를 보여 주기도 했다. 


국내 음악 페스티벌의 역사와 세계 페스티벌의 시작점에 대해 살펴 본 이 글을 통해 올여름 진행될 여러 음악 관련 페스티벌의 즐거움이 더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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