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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바다와 음원서비스의 등장

by Floyd 고종석


2000년, 소리바다와 음원서비스의 등장으로 전환점에 들어선 음악 산업


‘국민의 정부’ IT인프라 구축 후, 새로운 전환점에 선 음악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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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은 헌정 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 교체를 이뤘다. 새로운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문희상 정무수석 내정자가 제안한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며 출발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기며 국정을 마무리했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진행된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라고 밝혔다. IMF의 위기 속에서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정책으로 ‘사이버코리아21’이라는 정보화정책을 통해 IT인프라 구축과 IT산업에 대한 육성을 공표했고 지식기반 국가건설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1998년 당시까지 국내 인터넷 가입자 수는 1만 5천 여 명에 불과했고, 국민 대다수는 전화선을 이용한 PC통신에 의존해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KT와 SKT, LG 등 통신사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고, 이들 기업 간의 자연스러운 경쟁을 유도하면서 국민 대다수는 어렵잖게 이동통신과 인터넷 회선 가입을 이뤘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2002년 국내 인터넷 가입자 수는 1998년의 700배에 달하는 1,040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국민의 정부 5년간 대한민국의 인터넷 보급률과 IT산업 규모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2000년대 초반에 그 규모는 국가 GDP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때를 같이해서 전국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24시간 동안 자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PC방이 자리 잡았고, IT 관련 기업들은 게임과 커뮤니티, 포털 서비스 등을 통해 국가 성장 대전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음악 산업 역시 IT기술과 관련 서비스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새로운 영역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MP3의 등장, 음반과 음원 산업의 분리된 성장 계기

음악 산업은 저장매체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발달해 나왔다. 1998년 한국에서 IT산업의 토대가 마련되던 당시에 음악을 담아낸 저장매체는 CD와 LP, 카세트테이프, LD가 주를 이뤘다. CD와 LD 사이에 등장했던 저장 매체 중에는 MD가 존재한다. MD는 디지털 방식으로 음성을 기록, 재생할 수 있는 광자기 디스크로 일본 소니사가 1992년 개발한 차세대 기록 장치였다. CD와 달리 편리하게 녹음해서 자신만의 재생 목록을 만들 수 있던 MD는 100만 번 이상 지우고 다시 기록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저장용량은 140MB 정도로 최대 74분 분량의 정보를 저장했다. MD는 카세트테이프처럼 녹음이 자유롭고 디스켓과 같은 저장 방식을 채택해서 각광을 받았지만, MP3와 관련 디바이스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MP3는 1988년 독일에서 처음 개발되었고, 1995년 ‘.mp3’라는 확장자가 정의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파일명이다. MP3는 음향 데이터 중에서 가청주파수가 아닌 영역대의 소리를 삭제하고 남은 정보만을 모아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파일의 크기가 작다. MP3의 등장으로 음반에 수록된 음악을 파일로 변환해서 손쉽게 감상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더해서 MP3는 음악에 대한 재생과 저장매체의 혁신을 가져왔고, FLAC이나 MQA, MQS, ALAC와 같은 고음질, 무손실 파일로 고도화되며 하이파이 기기와 연관된 산업 구조도 확산해 냈다. 전 세계인이 MP3로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에 한국은 이미 IT를 활용한 음원서비스가 안착될 수 있는 제반 사항을 갖추고 있었다. 음악 산업 측면에서 MP3의 등장은 음반과 음원의 분리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곧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변환과 확장을 위한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P2P 냅스터와 소리바다, 불법이라는 주홍글씨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 고속 통신망이 급속도로 보급되던 시점에서 ‘스타크래프트(StarCraft)’ 못잖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서비스는 P2P(Peer To Peer) 파일공유 프로그램 ‘냅스터(Napster)’였다. 1999년 노스이스턴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숀 패닝(Shawn Fanning)은 음악파일을 쉽게 전송하고 저장할 수 있는 공유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냅스터라고 이름 붙여진 이 프로그램은 다른 사용자의 컴퓨터 안에 담겨 있는 MP3 등의 파일을 검색해서 자신의 컴퓨터로 자유롭게 가져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곧장 냅스터의 성장 가능성을 점친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졌고 서비스 개시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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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냅스터는 음악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서비스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급기야 냅스터를 이용해서 수많은 음악이 인코딩, 배포됨으로써 음악 저작물의 저작권 침해와 불법복제 시비가 야기되었다. 메탈리카(Metallica)는 곡당 10만 달러를 요구하며 냅스터를 고소했고, 닥터 드레(Dr. Dre) 등의 뮤지션들까지 줄줄이 소송을 제기했다. 반대로 이 사태를 반기는 뮤지션들도 나타났다.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척 디(Chuck D)는 ‘냅스터는 새로운 라디오다.’라며 음반사의 손해보다 음악을 듣는 이들의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냅스터는 오픈 3개월 만에 서비스 중지 판결을 받게 된다. 결국 2001년 8월 미국음반산업협회(RIAA)에 의해 서버가 폐쇄되었고, 2002년 불법 요소를 배제하며 유료서비스로 전환해서 서비스를 재개했지만 같은 해 파산하고 말았다. 2000년 전후 국내에서도 저작권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적잖은 P2P, 스트리밍, 다운로드 서비스 업체가 등장하게 된다.

2000년 양정환, 양일환 형제가 ‘한국의 냅스터’로 불리는 음악파일 공유사이트 ‘소리바다’를 오픈했다. 음악 파일 재생 프로그램인 소리통에 P2P 기능을 붙이는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유저들에게 배포되었다. 당시까지 국내에는 음원의 개념이 그다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변환된 음악 파일을 공유하며 원하는 곡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용이성으로 소리바다는 냅스터 못잖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다. 벅스(현재의 벅스와 다른 사업체), 맥스MP3, 뮤즈캐스트, 푸키, 아시아뮤직넷, O2뮤직 등 음원서비스 사이트들 역시 회원 유치에 공을 들이며 사업의 확장을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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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바다의 모토였던 냅스터가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공 콘텐츠의 제한이었다. 2001년 2월 샌프란시스코 법원은 ‘저작권법 보호를 받는 음악 파일들이 냅스터에서 공유될 수 없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냅스터는 RIAA와 음반사들이 요청한 리스트를 서비스에서 제외시켰다. 몇 차례의 타협점도 발견되었지만 냅스터 운영은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소리바다 역시 네티즌들의 공유문화와 음반사들의 저작권 논란 사이에 놓이며 위기를 맞았다. 2002년 7월 수원지방법원이 ‘음반복제 등 금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제한적인 서비스를 진행했다. 이후 소리바다는 저작권 보호를 위한 필터링 기술을 자체적으로 적용했지만, 저작권 관련 이슈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음반사들의 고소장이 줄줄이 접수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부분적인 서비스를 반복하며 버텨낸 소리바다였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은 쉽지 않았다. 2007년 소리바다는 필터링 기능을 강화한 ‘소리바다6’ 서비스를 시작하며 음원 서비스에 집중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진화를 거듭하며 성장한 벅스, 멜론, 펀케익, 튜브, 도시락 등의 음원서비스에 밀려나고 만다. 서비스와 사업의 전환점에서도 불법이라는 주홍글씨와 유저 이탈이 끊이지 않았던 소리바다는 음원 유통과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병행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최근에는 상장폐지 위기에 놓이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상태이다.


음반 위주로 흐르던 산업 규모가 음원 중심으로 전환

냅스터, 소리바다와 달리 초창기 국내 음원서비스 업체들은 저작권 위반 곡들만 선별해서 서비스를 제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2003년 2월 신나라레코드와 도레미레코드 등 25개 국내 음반사와 BMG코리아, EMI코리아 등 한국 직배 5개사는 10여 곳의 음원서비스 업체를 상대로 형사 고소를 진행했다. 형사 고소를 당한 업체들은 저작권 관련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진행하며 회원을 유치하고 있었다.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 사용료에 대한 정산과 서비스 음원들에 대한 계약 체결이었다. 해당 업체들은 과거 서비스분에 대한 정산과 정식 서비스 계약에 적극적이었다. 문제는 과거 사용분에 대한 정산을 위해 합리적인 계산이 도출되기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서비스되던 수많은 음원들에 대한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에 접촉해야 할 당사자들이 너무 많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관광부는 음반회사협의회 함용일회장(당시 YBM서울음반 사장)과 위즈맥스의 금기훈사장 등을 협상의 실무진으로 내세웠다. 음원서비스 업체들은 ‘케임스(Keims, 한국인터넷음악서비스업체협의회)’를 구성해서 협상에 임했다. 결국 변준민회장(맥스MP3 사장)을 위시한 뮤즈캐스트, 나인포유, 아이뮤페, 송앤닷컴, 푸키 등 8곳의 케임스 회원사는 과거 서비스분에 대한 보상을 해결하며 기존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중 일부 업체들은 음반사와 직접 계약은 물론 한국음원제작자협회, 만인에미디어와 같은 저작인접권 대행사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면서 서비스를 보강해 나갔다. 또한 맥스MP3 등 몇몇 업체는 축적된 회원정보와 메타DB를 인수 기업에 넘겨주는 대가를 받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당시를 기점으로 음악 산업은 음원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곧이어 서비스사들은 정산분배의 투명함을 위해 정산시스템을 개발해서 음반사 및 저작권 관련 협회들과 정보를 연동시켰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산 정보의 공유를 통해 음원서비스는 확장된 사업의 기로에 서서히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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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악만 무료여야 하는가’, 유료화 이후 안착한 음원서비스

1999년 11월 설립된 벅스는 국내 최초의 음원서비스 사이트였으며, 동종 업계 가운데 가장 많은 1,600만 명의 회원을 유치한 초창기 IT업계의 절대강자였다. 소리바다와 함께 불법 서비스로 낙인찍혔던 과거의 벅스는 아인스디지털이 네오위즈의 투자를 통해 인수한 이후 ‘벅스’라는 브랜드명을 유지한 채 전혀 다른 현재의 벅스로 탈바꿈되었다. 이후 네오위즈벅스, 주식회사벅스 등의 사명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NHN의 계열사인 NHN벅스에서 운영하면서 DB와 음질, 연관 콘텐츠에도 특히 공을 들이며 서비스를 전개하고 있다. 소리바다와 여타 음원서비스 사이트와 달리 사후 정산 방식 등을 고수하며 위태롭게 운영되던 벅스가 2004년 전격적으로 유료서비스를 선언했다. 이는 과거의 벅스를 버리고, 새로운 경영 체계 아래 합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의미를 지녔다. 이를 계기로 ‘음원은 공짜’라는 일부 네티즌의 인식은 유료화에 적응하는 단계로 이어졌고, 음원서비스 업체들은 싸이월드의 배경음악서비스 못잖은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기 위한 연구를 거듭했다. 음원서비스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SKT(멜론)와 KT(올레뮤직), LG(뮤직온) 등 이동통신 관련 기업들도 인수합병 등의 방법으로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음원서비스를 오픈하며 회원 유치 경쟁에 몰입했다. 이동통신 가입자들을 자사의 음원서비스로 연동하는 방식은 몇 겹의 반복된 과정을 지나 멜론과 지니뮤직, 플로우 등 서비스로 이어져 나오고 있다.


2003년부터 2년 여 동안 진행된 음원서비스의 합법화를 통해 음원서비스 시장은 음악 관련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으로 성장했고, 관련 기업들은 큰 도약과 성장을 거두게 된다. 대표적인 수익원이었던 싸이월드의 배경음악과 컬러링, 벨소리, 스트리밍 등을 통해 음원서비스 시장 규모는 2000년 450억 원에서 2003년 1,850억 원으로 4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음반과 관련된 시장의 축소는 음원서비스의 등장 이후부터 급속하게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음반소매상협회의 자료에 의하면 1995년까지 전국적으로 1만 2천 여 곳에 이르던 음반 판매점은 소리바다와 음원서비스 업체들이 등장한 2000년대 초반에 700여 곳으로 수직 하락했다. 또한 한국음반산업협회는 2000년까지 4,104억 원의 규모를 보이던 국내 음반시장의 규모가 2003년 1,833억 원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고 밝혔다. 탄탄하게 운영되던 국내 직배사 역시 이러한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2002년 300억 원에 가깝던 연매출은 2003년에 100억 원대 이하로 줄어들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음원서비스의 안착 속에서 대중의 이목이 음반보다 음원에 집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음악 산업이 이원화된 초창기에 음악을 창작하고 제작하는 이들은 제대로 된 분배를 얻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도 존재했다. 초창기 서비스 중 각광받았던 서비스 모델인 컬러링의 경우 수익의 50%를 이동통신업체가 가져가고, 남은 절반 중 19%는 컬러링업체가 가져갔다. 1건에 700원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700원 중 483원을 업체가 갖고, 음악을 만든 창작자와 제작자에게는 217원이 돌아가는 셈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개선되고 보강된 분배방식도 나타났지만, 분배 구조가 여전히 업체에 치중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이원화된 음악 산업의 동반 상승은 불가능한가? 남겨진 과제

음원 산업의 규모가 커진 만큼 서비스사의 의무가 이전보다 책임있게 실행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불법으로 시작된 음원서비스가 합법적인 서비스로 전환되면서 나타났던 가장 큰 오류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월정액을 3천 원이라는 초저가로 책정했다는 부분이다. 이후에도 서비스 과금의 기준점으로 적용되었던 이 단가는 음악을 창작하고 제작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분배가 이어지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지닌 채 수정을 거듭해 나왔다. 일부 서비스사가 서비스의 질적인 보강에 치중하는 것에 비해 과금 정책에 편향된 기획과 운영을 전개하는 몇몇 사이트의 행태는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또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이 콘텐츠를 유통하고 서비스까지 포함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나타난 오류 역시 보정되어야 할 부분임에 분명하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의 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시작된 IT산업은 소리바다와 다수의 음원서비스 사이트의 등장으로 전국민의 환영을 이끌어냈다. 음원 산업은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 음반 산업보다 월등한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마련했다. 음원을 통한 수익이 커진 만큼 관련 기업들은 제작자와 창작자, 그리고 유저의 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보다 좋은 음악이 생산될 수 있는 안정된 분배 환경과 콘텐츠 보강은 관련 기업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전보다 풍족한 결과와 즐거움을 전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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