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yd 고종석 Sep 03. 2024

거칠지만 아름다운 음악 속 사람들 3

한국 헤비메탈의 신드롬 형성과 촉진을 더했던 사람들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이 교차하며 공연과 이슈를 바탕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해 오고 있는 해외 헤비메탈의 위세와 달리 한국 헤비메탈의 불씨는 짧은 기간 동안 확 타올랐다가 급격하게 사위었다. 조하문과 김수철의 출현을 이끈 마그마, 작은거인, 무당 등의 음악적 맥을 이으며 한국 헤비메탈은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대중음악 신에 안착했다. 국내에서 헤비메탈은 1985년 시행된 서울시의 문화예술 정책과 연관관계를 가지며 대중과의 소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서울시는 당시 대학로 일대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을 ‘차없는 거리’로 운영했다. 직전부터 종로 파고다 예술관과 이태원 록월드에서 공연을 펼치던 각지의 스쿨밴드와 아마추어 밴드들은 자연스럽게 대학로에 운집해서 연주를 펼쳤다. 일반인들에게 노출된 그들의 음악과 패션은 단연 인기를 모았다.



첫 헤비메탈 작품으로 기록된 시나위의 데뷔작과 부활, 백두산의 데뷔 앨범이 발매된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 헤비메탈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도 레코드의 김재선 실장이 기획한 컴필레이션 [Friday Afternoon] 시리즈를 발판으로 한국 헤비메탈은 확장의 기로에 설 수 있었다. 백두산, 작은하늘, H2O, 블랙 홀(Black Hole),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 제로 지(Zero G), 나티(Naty), B612, 아시아나(Asiana), 티삼스 등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김태원의 대마초 구속과 이승철, 김종서, 임재범 등 밴드 출신 보컬들의 솔로 데뷔가 나름의 배경이었고, 한국 헤비메탈의 기세는 당시를 기점으로 틀어지고 말았다.      


1990년대 초반 국내 헤비메탈 팬들의 관심은 해외에서 쏟아져 나온 새로운 헤비메탈로 전이되었다. 대중의 이목에서 벗어난 국내 헤비메탈 밴드들은 이때부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의 암흑기에 접어들고 만다. 당시는 전세계적으로 글램메탈과 스래쉬메탈의 뒤를 잇는 그런지와 얼터너티브가 강세를 띄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국내 마니아들은 정통 헤비메탈에 가깝게 포진해 있던 스래쉬메탈과 네오클래시컬메탈, 파워메탈에 유독 열광했다. 특이하게도 1980년대 후반 국내에 진입한 해외 대형 레이블들은 이 장르에 대한 라이센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틈새를 노린 삼성과 LG, SK 등 일부 대기업들이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을 설립하거나, 크래쉬(Crash)와 같은 밴드를 직접 제작하는 열기도 더해졌다. 그러나 이들의 사업 전개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 사이 밴드 멍키헤드(Monkeyhead)와 클럽 록월드, 백스테이지 등이 등장하며 잠시간 신이 요동쳤다. 무엇보다 마니아들을 들끓게 만든 헤비메탈의 축은 의외의 대목에서 등장했다.


바로 대중가요의 기획과 제작에 집중하던 서울음반과 지구레코드가 이전까지 소개되지 않던 유수의 헤비메탈 장르의 음반을 라이센스로 배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음반사는 각기 다른 장르의 헤비메탈을 라이센스로 유통하면서 마니아들에게 보다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전했다. 서울음반은 노이즈(Noise Records)를, 지구레코드는 로드러너(Roadrunner Records)와 쉬라프넬(Shrapnel Records)에 중심을 뒀다. 록음악 전문 월간지 핫뮤직의 광고 페이지가 늘어나면서 발행 부수 역시 이전보다 늘어났음은 자명했다. 당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서울음반과 지구레코드가 유통하는 세 레이블의 음반을 사기 위해 거의 매일 음반매장에 들릴 정도였다. 노이즈와 로드러너, 쉬라프넬의 음반은 특별한 정보가 없어도 믿고 사서 듣는 음악, 바로 그 자체였다. 일부 학교에서는 노이즈파와 로드러너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이들 레이블의 인기몰이는 대단했다.      


서울음반(담당자 김경진)이 선택한 노이즈 레코드는 1983년 독일에서 설립된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이다. 자국은 물론 유럽의 실력파 밴드와 뮤지션들의 음반을 발매하던 노이즈는 2001년 생츄어리(Sanctuary Records)에 매각되었고, 현재는 BMG의 계열사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초기에 펑크에 주효한 음반을 내놓다가 크리에이터(Kreator), 탱카드(Tankard), 사밧(Sabbat), 코로너(Coroner) 등을 발매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닝 와일드(Running Wild), 셀틱 프로스트(Celtic Frost), 보이보드(Voivod), 레이지(Rage) 등 걸출한 밴드의 음반을 소개하며 새로운 전문 헤비메탈 레이블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노이즈의 성공에는 헬로윈(Helloween)의 등장이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Keeper of the Seven Keys’ 시리즈의 성공 이후 노이즈는 EMI와 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헬로윈의 디스코그래피 가운데 가장 저조한 히트를 기록한 [Pink Bubbles Go Ape](1991)처럼 노이즈의 위세는 이 시점을 기해 크게 꺾이고 말았다.  

   

지구레코드(담당자 김민수)가 공을 들인 두 레이블 중 로드러너는 네덜란드에서 1980년에 설립된 회사로 현재는 대형 음반사로 성장했다. 초창기 로드러너는 북미 메탈 밴드의 음악을 유럽으로 수입하는 것으로 시작됐으며, 킹 다이아몬드(King Diamond)와 어나일레이터(Annihilator)의 성공을 통해 기반을 잡았다. 이후 디어사이드(Deicide)와 데스(Death), 머신 헤드(Machine Head), 서포케이션(Suffocation), 세풀트라(Sepultura), 타이프 오 네거티브(Type O Negative), 슬립낫(Slipknot)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끝없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로드러너의 로고와 파란색 재킷 테두리를 두른 카세트테이프와 LP는 무조건 구매각이었다.      

쉬라프넬은 마이크 바니(Mike Varney)라는 불세출의 프로듀서가 설립한 음반사이다. 그는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 마티 프리드만(Marty Friedman), 토니 맥칼파인(Tony MacAlpine), 폴 길버트(Paul Gilbert), 그렉 하우(Greg Howe), 비니 무어(Vinnie Moore), 데이빗 T 체스테인(David T Chastain), 리치 코첸(Richie Kotzen) 등 당대에 명성을 날린 여러 기타리스트를 직접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프로그레시브록과 프로그레시브메탈 위주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Records)와 퓨전 재즈를 전문으로 제작한 톤 센터(Tone Center Records)를 통해 마젤란(Magellan), 섀도우 갤러리(Shadow Gallery), 알렉스 스콜닉(Alex Skolnick), 크리스 노리스(Kris Norris), 마이클 리 퍼킨스(Michael Lee Firkins) 등 다수의 라이브러리까지 형성했다. 쉬라프넬을 통해 제작된 멜로딕스피드메탈 계열의 밴드와 속주 기타리스트의 음반은 국내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결과를 양산했다. 미스테리(Mistery)와 디오니서스(Dionysus)의 멤버로 대표적인 속주 기타리스트였던 안회태, 배재범과 이현석, 김태호 등의 테크니션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등 1990년대 중반의 대한민국 헤비메탈은 속주에 미쳐 연주하고 속주에 취해 감상을 더하던 시기였다.     


한국 헤비메탈이 대중의 사랑을 받던 시절에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 그리고 음반사와 관계자들이 공존했다. 여러 이유와 상황을 유추해 봐도 갑작스럽게 그 열기가 식은 이유를 분명히 토로할 수 없겠다. 한국 헤비메탈의 시작점에서 출발해서 지금도 긴 음악 여정을 걷고 있는 밴드가 아직도 몇몇 존재한다. 그리고 당시의 자양분을 통해 성장하고 파생된 새로운 밴드와 뮤지션들도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 헤비메탈이 다수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다시 오길 바란다.


최근 전북 완주의 삼례책마을에 DJ 김광한이 남긴 유품들을 마주할 수 있는  특별 전시가 열렸다. 이 글을 빌려 한국 헤비메탈의 안착과 부흥을 이끌었던 故김광한 선배와 故김재선 선배, 故하세민 선배의 영면을 기원한다.


하세민 음악평론가 관련 글 읽기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Exit Ede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