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음에 HOT MUSIC을 포함한 과거 음악 잡지를 자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분이 계십니다. 음반과 잡지, 라디오, 신문, 단행본, 음반 기획과 제작, 유통, 공연기획을 포함한 여러 음악 분야에서 활동했던 그분은 아직도 가끔 관계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합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더 아쉬움이 큰 故하세민 선배를 기억합니다.
1964년 4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하세민(본명. 김광진)은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잠시간 방황의 시기를 맞이했다.
몇 년 후 어머니의 재혼으로 세상에 대한 큰 낯섦을 느끼던 그의 감성을 메꿔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음악과 그림 속에 파묻혔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하세민은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고 20세 나이에 무아다방 DJ로 음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1984년 당시부터 음악 관계자와 마니아들에게 ‘음악을 많이 아는 젊은 DJ’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하세민은 생계유지를 위해 뉴코아에 취직해서 디자인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된다. 퇴근 후에 그는 영등포에 위치한 미진다방에서 DJ를 맡았고, 상도동에 위치한 디제이 아카데미에서 강사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생업 사이에서 적잖은 갈등이 빚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음악을 향한 혼을 태우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자신이 지닌 음악에 대한 지식과 감성을 활자로 표현하고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굵고 짧은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완성시킨 잡지는 이기용, 장민영, 박종규 등과 함께 완성한 ‘뮤직피플’이었다.
신문 형태의 무가지였던 ‘뮤직피플’은 국내에서 헤비메탈이 인기를 얻으면서 1987년 12월 ‘메탈뉴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발행되기 시작했다. 보다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싶었던 하세민은 헤비메탈 마니아이자 편집인이었던 여상관에게 ‘메탈뉴스’를 넘겼다. 여상관은 동시에 장현희를 영입해서 KHMC을 설립했고 좀 더 내실 있는 책자로 전환을 이루기 시작했다. KHMC에서 발행되기 시작한 ‘메탈뉴스’는 1989년부터 월간지 형태로 변형되어 여러 음반매장에 무가지로 배포되었고, 마니아와 음악 관계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메탈뉴스’의 저력이 쌓여가던 시기에 하세민은 성우진과 김시광, 오수석 등과 함께 새로운 무가지 ‘페이모스’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했던 이들이 함께 했던 ‘페이모스’는 발행 이전부터 마니아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웬만한 음악 전문지 이상의 편집 아래 여러 리뷰가 함께 실렸던 ‘페이모스’는 너무 강한 개성을 지닌 이들이 시스템 없이 함께 했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축을 이루던 성우진이 뮤지션과 마니아를 대상으로 창간을 준비하던 ‘뮤직랜드’에 편집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아쉽게도 ‘페이모스’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세민은 누구보다 활자를 통해 새롭게 각광받던 1980년대의 여러 음악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월간지를 이끌지 못하고 창간에만 여러 번 참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결국 1992년 하세민은 박종규와 함께 월간지 ‘뮤직피플’을 창간하기에 이른다. 이미 1987년에 창간되었던 ‘뮤직피플’의 제호를 다시 한번 꺼내 든 하세민과 박종규 등은 책이 나오면 대학로에 위치한 인켈 아트홀에서 음악감상회를 자주 열었다. 이 음감회를 통해서 그는 마니아들과 교류의 시간을 가졌으며, 특히 음악을 좋아함에도 수줍어서 나서지 못하던 중고등학생들을 잘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뮤직피플’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뮤직피플’은 하세민에게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던 잡지였다. ‘뮤직피플’을 통해 그는 평생 자신의 곁에서 함께 하게 될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며, 당시에 펼친 여러 활동을 통해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큰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뮤직피플’ 이후 하세민은 신문 형태의 음반 종합 전문지 ‘디스크리뷰’를 창간했다.
이후 혜성음반과 포니캐년, BMG, 삼성영상사업단 등에서 음반 기획과 제작, 홍보를 담당하며 음악 관련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했다. 1996년 6월 하세민은 활자에 대한 마법에 다시 한번 빠져들고 만다. 그는 음악 전문 출판사 ‘꾼’을 설립해서 단행본 사업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음악을 듣고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교과서로 통했던 여러 단행본을 발행했지만, 점차 내용과 편집의 한계를 드러내며 악재가 쌓여갔다. 그러던 1998년 봄부터 하세민은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하세민은 활자를 통한 좋은 음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결국 같은 해 6월 과로로 쓰러진 하세민은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고, 정밀진단 결과 간경화 초기 증세를 진단받게 되었다. 보름 여 동안 입원해 있던 하세민은 주변의 만류에도 다시 필드에 나섰고, 급기야 새로운 종합 월간지 ‘하모니’를 창간해냈다. 그러나 기존 잡지와 달리 올 아트지에 올 컬러로 편집을 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했던 ‘하모니’마저 이목을 이끌지 못하면서 그는 같은 해 10월 다시 한번 입원하고 만다. 1999년 4월 여의도성모병원에서 부천성가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하세민은 같은 해 5월 29일 어머니와 두 자식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누구보다 음악과 관련한 기획력이 뛰어났던 하세민은 생전 자주 찾던 속초 영랑호 쪽 바닷가에 마지막 자취를 남겼다.
그 날 자리에는 여상관과 장현희, 박종규, 이기용, 김효성, 이학이, 장인호 등 몇몇 선후배가 함께 자리했다. 하세민의 삶은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를 지니고 영향을 남겼다. 그가 생전에 발행했던 여러 잡지와 단행본은 최초의 시도를 많이 담고 있었다. 또한 그가 음악계를 동경하던 후배들에게 전하던 살가운 정과 지식은 현재에도 작게나마 이어져 번지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후배 평론가의 말을 잠시 전한다. “음악 일을 하려면, 음악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이해해야 해. 하지만 음악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을 겉으로 너무 내세워도 안 돼.” 음악계와 평론계에서 누구보다 정감 있고 단아했던 하세민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함께 자리하던 선배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더하며 글을 맺는다. “세민 씨가 살아 있었으면, 이 판이 더 제자리로 돌아오고 더 나아졌을 텐데. 조금만 더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