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518민주화운동을 접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빈번하던 당시에 그들을 매일 아침 7시에 운동장으로 출근하게 해서 얼굴을 확인하던 총장과 녹두대의 깃발이 펄럭이던 대학교의 부속중학교를 다녔다. 2학년 수업 시간 중 5층에 위치했던 교실 안으로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이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칠판에 난해한 기호를 써 나가던 선생님이 ‘핑’ 소리와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 온 최루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번, 수건에 물 묻혀 갔고 그거 확 갔다 버려 부러라.”는 말은 당연한 행동 요령이었다. 약 먹고 뻗어있는 쥐를 집어 올린 듯 “아직 따숩네. 저 짝으로 던져 불까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던 담당 주번의 모습도 떠오른다. 1980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진 최루탄은 수업 시간의 정적을 깨는 쥐 한 마리의 난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성장을 하고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가끔 찾는 고향은 갈수록 작게 느껴진다. ‘이 작은 도시에서 그토록 엄청난 만행이 저질러졌다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적잖다. 한 때 넓어 보였던 도청 앞 분수를 둘러싼 도로 주변은 서울의 웬만한 지역에 널려있는 한 블록(구역) 정도로 작아 보인다. 그래도 어릴 적 기억에 준해서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전망대와 4수원지, 충장사를 지나 도착하게 되는 무등산장 길이다.
무등산장은 ‘무등산 속에 있는 별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무등산국립공원의 원효분소 지역을 의미한다. 그 지역의 초입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지산유원지를 지나 그 곳으로 향하는 내내 구부러진 도로와 근처 산태의 경사, 그리고 긴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찔한 풍경은 아직도 처음 갔었던 어릴 적 기억 그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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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고 위태롭던 1980년대의 움직임 속에서 젊음의 패기와 의기는 음악을 통해 단단해질 수 있었다.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하고 음미했던 음악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대중음악은 사회의 변화만큼 다채롭게 요동쳤다. 시대를 통틀어 감정을 테크닉에 싣기 시작한 알찬 음악이 여럿 등장했고, 지금에는 상상도 못할 뮤지션과 가수들의 음반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냉혹하게 팽창되던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음악은 대중에게 유연하게 연결되어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방송 출연에 의지하지 않고 라이브와 공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인지도를 쌓았던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김현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