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yd 고종석 Jan 17. 2020

김현식과 기억 한 조각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518민주화운동을 접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빈번하던 당시에 그들을 매일 아침 7시에 운동장으로 출근하게 해서 얼굴을 확인하던 총장과 녹두대의 깃발이 펄럭이던 대학교의 부속중학교를 다녔다. 2학년 수업 시간 중 5층에 위치했던 교실 안으로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이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칠판에 난해한 기호를 써 나가던 선생님이 ‘핑’ 소리와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 온 최루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번, 수건에 물 묻혀 갔고 그거 확 갔다 버려 부러라.”는 말은 당연한 행동 요령이었다. 약 먹고 뻗어있는 쥐를 집어 올린 듯 “아직 따숩네. 저 짝으로 던져 불까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던 담당 주번의 모습도 떠오른다. 1980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진 최루탄은 수업 시간의 정적을 깨는 쥐 한 마리의 난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성장을 하고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가끔 찾는 고향은 갈수록 작게 느껴진다. ‘이 작은 도시에서 그토록 엄청난 만행이 저질러졌다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적잖다. 한 때 넓어 보였던 도청 앞 분수를 둘러싼 도로 주변은 서울의 웬만한 지역에 널려있는 한 블록(구역) 정도로 작아 보인다. 그래도 어릴 적 기억에 준해서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전망대와 4수원지, 충장사를 지나 도착하게 되는 무등산장 길이다.
무등산장은 ‘무등산 속에 있는 별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무등산국립공원의 원효분소 지역을 의미한다. 그 지역의 초입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지산유원지를 지나 그 곳으로 향하는 내내 구부러진 도로와 근처 산태의 경사, 그리고 긴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찔한 풍경은 아직도 처음 갔었던 어릴 적 기억 그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급변하고 위태롭던 1980년대의 움직임 속에서 젊음의 패기와 의기는 음악을 통해 단단해질 수 있었다.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하고 음미했던 음악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대중음악은 사회의 변화만큼 다채롭게 요동쳤다. 시대를 통틀어 감정을 테크닉에 싣기 시작한 알찬 음악이 여럿 등장했고, 지금에는 상상도 못할 뮤지션과 가수들의 음반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냉혹하게 팽창되던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음악은 대중에게 유연하게 연결되어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방송 출연에 의지하지 않고 라이브와 공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인지도를 쌓았던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김현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떠났던 슬픈 평론가, 하세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