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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yd 고종석 Jun 15. 2017

윤상의 군대 훈련소 시절 이야기

1993년 군입대 후 함께 했던 훈련소 생활 속 그를 기억하며

윤상의 '가려졌던 시간' 그 사이로 잠시 떠나 보자.

누구에게나 오래도록 기억되는 인연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자신의 삶 속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시기와 장소인 군대. 나는 오늘 군생활의 시작점에서 잠시 함께 했던 가수 윤상과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 한다.

1993년에는 어떤 일이

1993년은 금요일로 시작되었다. 미국의 새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취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도 취임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세계무역센터에 폭탄 테러가 발생되었다. 이 중 두 가지의 행적은 5년 후에 IMF 외환위기를, 그리고 8년 후에는 911 테러라는 역사의 오명으로 이어졌다.

1982년부터 대학입시로 자리했던 학력고사의 시대가 저물고, 1993년은 현재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처음으로 시행된 해였다. 방탄소년단과 비투비에서 각각 랩을 담당하는 슈가와 프니엘, 그리고 스텔라의 효은과 씨스타의 다솜, 걸스데이의 민아, 배우 박보검과 이민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또한 새 해 벽두부터 명배우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이 들렸으며, 조계종의 종정인 성철 스님 역시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사건은 10월 10일에 발생한 서해 페리호 참사였다. 70명의 생존자가 존재했음에도 사망과 실종자의 수는 292명에 이르렀다. 사고 이후 언론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후진국형 인재’로 규정했다.

그렇게 1993년은 꽤나 오래된 과거이며, 또한 현재를 잇게 만든 여러 이야기들이 존재했던 해였다. 1993년의 늦겨울, 그러니까 1월과 2월 음악계는 현진영과 철이와 미애의 인기가 엄청났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댄스곡이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은 그만큼 사람들이 음악 속에 파묻혀서 일상을 잊고 싶어 했던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봄이 다가오며 겨울 빛을 드리웠던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의 인기와 더불어 주제가 역시 전국을 강타했다.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 거리와 TV, 라디오를 장악할 즈음에 다음 해를 위한 겨울은 또 어김없이 다가왔다.


인기의 정점에서 조용히 입대했던 윤상

1993년 12월 21일은 화요일이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은 어쩌면 꽤나 화사한 날씨였다. 이 날은 나의 군입대일이었다. 이 글은 그 날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해체된 306보충대는 의정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충대는 신병들의 소집부대를 뜻한다. 입소와 동시에 훈련이 진행되는 논산 훈련소와 달리 보충대는 사단 배치에 앞서 신병들을 소집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공간이었다. 보충대에서 하루를 보낸 신병들은 이후 자신의 소속 사단 신병 교육대로 다시 이동해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각 사단 신병 교육대로 직접 입소하는 현재와는 다른 입영 시스템이었다. 그 해의 마지막 신병 소집이기도 했던 그 날, 의정부 306보충대로 가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동해서 도착하기까지 곳곳에서 교통 정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인원이 입대를 해서 그런가 보다.’는 혼잣말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은 보충대 입구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곳곳에 방송국 차량과 일간지 보도차량이 무리를 지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이 기다린 이는 다름 아닌 윤상, 아니 신병 이윤상이었다. “윤상의 인기 정말 대단하다. 마음도 안 좋을 텐데... 그런데 아무도 안 보이네.” 입대를 축하한다며 함께 나선 친구의 말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병 교육대 퇴소식 때에 비로소 그 읊조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윤상하고 같은 부대로 가면 대박이겠다." 다른 입대자를 배웅하러 온 어떤 이가 내뱉은 말이었다. 누구의 바람도 없었겠지만, 잠시간 우리가 된 1993년 12월 21일 306보충대의 신병들은 그렇게 군에서의 첫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며 두려웠고, 또한 신기했던 그 날 저녁 우리는 군복과 개인 물품을 전달받았다. 곧장 입고 왔던 옷과 신발, 소지품들을 개인 박스에 모두 넣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포장된 박스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 과정은 마치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연상시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휘둘러보던 관리병들의 눈을 피해 나는 황급히 쪽지 하나를 써서 박스에 집어넣었다. 내 옆에서 옷가지를 포장하던 우리 중의 하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뭔가를 적고 포장을 시작했다. "엄마, 나 잘 있어. 아무 걱정 마세요. 엄마 먼저 챙겨." 그의 글도 분명 나와 비슷한 내용이었으리라.

다음 날이 되자 그새 안면을 익힌 우리 중 한 무리의 대화가 대기실 안의 침묵을 깼다. "17사단을 가야 한데. 환상이래." ‘26개월간의 시간 동안 어떤 상황이 환상을 이끌 수 있을까.’ "3사단과 5사단에 걸리면 그냥 죽었다 생각하래." ‘아무 이유 없이 죽을 수 있는 곳이 군대였단 말인가.’ 누군가는 어디서 들었는지 그나마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했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당시에 가장 필요한 정보였기에 무심히 지나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 날 우리는 사단 배치를 받고서 해당 신병훈련소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또 윤상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캬. 윤상하고 같은 훈련소를 가면 얼마나 편할까?" "그치? 설마 윤상같은 유명인이 함께 훈련을 받는데, 힘들게 훈련시키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누구였는지 지금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이 글을 빌려 이야기하고 싶다. "얘들아. 똑같았으면 똑같았지. 덜한 거는 전혀 없었어."라고.

내가 사단 배치를 받은 곳은 파주에 사단본부가 있는 1사단이었다. 솔직히 궁금했다. '괜찮은 곳일까.' '파주라면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1사단 신병 교육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 같은 버스에 탄 누군가 조용히 외쳤다. "와. 우리 윤상하고 보충대 동기에다가 훈련소 동기까지 되었네." 우리 중의 일부가 된 새로운 우리. 그는 뭐가 그리 신났던 걸까. 하지만 나 자신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 윤상과 같은 훈련소라니, 뭔지는 몰라도 일단 안심이 된다.’


누구에게나 낯설고 끔찍했을 훈련소 생활

의정부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을 조금 넘어서 우리는 1사단 신병 교육대에 도착했다. 입구 주변에는 생소한 글귀 여러 개가 커다란 해골 모양 그림과 함께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천하제일사단 신병훈련소'

무언가를 채 느끼거나 생각하기도 전에 갑자기 타고 있던 버스가 다급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둔탁하게 버스 출입구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온갖 욕설과 고함이 요동을 쳤다. 그 분위기를 연출한 이들은 우리를 6주 동안 훈련시킬 조교들이었다. 한 마디로 "나 무서운 사람이야. 니들은 이제 내 말을 너무나 잘 따라야 해. 어흥! 어때? 나 무섭지?"라는 식이었다.


연병장이라 불리는 곳에 1사단 신병 훈련소 383기 훈련병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위탁훈련을 요청한 근처 9사단의 신병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를 부르는 조교들의 호칭은 ‘삼백팔십삼 기 훈련병'으로 이미 지정되어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각자 소대 배치를 받게 되었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3소대였다. 막사 안에는 호리호리하지만 아저씨 같은 기운을 품은 조교 3명이 기세 등등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지시에 따라 부여받은 번호순으로 각자의 위치에 짐을 내려놓았고, 조교 중 한 명은 소대의 훈련병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낯익은 이름이 불려졌다. “157번 훈련병 OOO”, “네! 157번 훈련병 OOO”. “158번 훈련병 이윤상”, “네!! 158번 훈련병 이.윤.상”.


파주의 외딴 지역, 5 공화국 시절에 삼청교육대로 사용되었다는 1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나와 훈련병 이윤상의 6주간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갔고, 훈련의 강도는 갈수록 거세졌다. 그런 시간이 덧입혀질수록 동기들 사이에는 나름 정이 생기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도 하게 되었다. 물론 이윤상 훈련병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서로 마주하다.

당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역시 친구와 가족들이 보내준 우편물이었다. 매일 훈련을 마치고 침상에 대기를 하면 악마같던 조교들도 어느새 다정한 형이 되어 각 우편물의 주인공을 불러서 전달을 했다. 가장 많은 우편물을 받았던 이는 당연히 이윤상 훈련병이었다.

우편물 외에 그에게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큼지막한 소포가 도착했다. 그를 제외한 50여 명의 소대원은 훈련 주차가 어느 정도 쌓이면서 조교들의 배려 속에서 달달한 과자를 가끔 맛볼 수 있었다. 모든 신병 훈련소가 그렇듯 우리는 흡연도 사제 물품도 사용하거나 소지할 수 없었다. 막사 앞에 한 대 있는 공중전화 역시 통제를 받으며 생활해야 했다. 가끔 조교 눈을 피해 전화를 시도하던 선배 훈련병들도 있었지만, 통화를 마치면 오히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든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황급히 눈을 떴다. '오늘 나 불침번 아닌데..' 나를 흔든 이는 다름 아닌 이윤상 훈련병이었다. 막사 안 불침번은 이윤상 훈련병과 이미 이야기가 된 듯 우리 쪽의 움직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소대원이 깨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막사 밖으로 나온 나에게 이윤상 훈련병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데, 너도 먹고 싶다면 우리 같이 먹을래?” 엄청난 유혹이었고,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훈련병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라면, 저도 참 좋아하고, 아니 좋아했던 그 라면...’ 조교들은 이윤상 훈련병을 ‘윤상씨’라고 호칭했고, 소대원들은 그를 어느 시점부터 ‘상이 형’이라고 불렀다. 말수가 거의 없던 상이 형이었지만, 음반사에서 근무하다가 입대를 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인지 간혹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조용히 지나가며 "오늘 훈련 힘들었지? 기운 내자." “어. 형두 고생했어!” 이런 식이었다.


“형, 좋긴 한데. 그러다 조교들한테 걸리면 어떻게 해요.(사실 걸려도 좋아요..) 우리는 돈도 지닌 게 없잖아요.(대단한 상이 형은 가지고 있을 거야..)” “걱정 마.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돼. 같이 가자.” 그 날 그 시간은 해가 바뀐 1994년 1월 중순의 어느 밤 12시 즘이었다. 나의 나이 스물둘,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 된 시간이기도 했다. 이미 영하 10도를 넘어선 추위가 온 몸 구석구석을 깊숙이 찔러대고 있었다. 화장실 바로 옆에 자리했던 컵라면 자판기는 조교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훈련병들에게는 ‘꿈의 레스토랑’이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데리고 이동한 상이 형은 자판기에 오백 원 동전 두 개를 집어넣었다. ‘아... 동전을 넣으니 컵라면이 나온다.’ 마치 처음으로 라면을 마주하고 자판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모든 과정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식욕 가득 찬 어린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고서 넘길만한 침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상이 형의 눈동자에는 고인 침보다 더 간절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우리 둘은 주변을 살폈다. 바깥에서 먹었다가는 지나가는 불침번이나 초소 근무자들에게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들키면 안 되니까, 음.. 그래 이 안으로 들어가서 먹자.” “네네. 형!(지금 저는 어디든 좋아요..)”


우리는 국물 한 방울, 라면 한 가닥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흡입했다. 컵 안의 내용물이 사라질수록 먹는 속도는 줄어들었다. 그것은 밥을 먹던 어느 개그우먼이 갑자기 울어서 “왜 우냐?” 물으니 “밥이 점점 사라져서요.”라고 말하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포만감이 아닌 멋진 한 끼 식사를 마친 듯 만족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며 나올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막사 안 침상에 누웠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 그릇의 컵라면으로 전달된 엄청난 포만감은 지금에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함께 컵라면을 먹었던 장소가 재래식 화장실 안이었다는 점이다.


훈련병 이윤상과 가수 윤상 사이에서

각 사단과 소속에 따라 경례 구호가 다르다. 1사단의 경례 구호는 ‘전진’이었다. 625 전쟁 당시 백두산에 가장 먼저 전진해서 천지의 물을 마셨다는 1사단은 ‘전진부대’로도 통한다. 전진부대 천하제일사단이 자랑으로 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화 사격 시스템이었다. 훈련소와 근거리에 위치한 그곳은 ‘전진사격장’으로 불렸다. 383기 기수들 가운데 ‘전진사격장’에서 진행된 사격 측정에서 훌륭한 기록을 남긴 이가 있다. 바로 이윤상 훈련병이다. 총 20발의 사격 훈련 측정에서 그는 20발을 모두 맞춰서 중대원 가운데 1위를 차지했었다.

이후 후반기 훈련에서 이윤상 훈련병은 허리 이상으로 몇몇 훈련에서 빠져야만 했다. 나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훈련 이후 녹초가 되어 돌아온 동기들을 바라보며 너무나 미안해하던 그의 선한 눈빛을. 6주간의 훈련을 마쳐가던 어느 날, 나는 ‘사람 이윤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악마와 같았던 조교들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다정한 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별도로 준비한 과자와 음료를 양쪽 침상에 깔게 했고. “훈련이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오늘은 우리 형과 동생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라는 말을 더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훈련 기간 동안의 일과 바깥세상에 남겨 놓고 온 이야기들을 나눴다. 우는 아이, 웃는 아이, 환호하는 아이. 그래 내 기억에 그때 우리는 모두 아이와 같았다. 어느새 아이 중에 가장 큰 아이였던 158번 훈련병 이윤상이 발언할 순서가 다가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처음에 나도 무척 낯설었지만,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내가 여기 동기들에게 한 가지 미안함이 있다. 나이도 많고 주목받는 사람이라서 동기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 특히 허리로 특정 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나와 달리, 이 추위에 그 힘든 훈련을 마치고 들어오던 여러 동기들에게 너무 큰 미안함을 느꼈었다. 여러분과 함께 훈련을 받고, 함께 한 시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


순간 숙연해졌다. 누구라 할 거 없이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내가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니들을 위해 노래 하나 불러주고 싶어.” 몇몇 간부와 조교들, 기타 상관들이 가수 윤상의 노래를 듣기 위해 수십 차례 지시 아닌 지시를 해도 조심스럽게 물리던 그였다. 그런 그가 동기들을 위해 스스로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어리둥절해 있던 우리와 달리 말을 마친 그는 박수로 잠시 박자를 유도하고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래의 정점에서 우리는 그 어떤 훈련 때보다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가 그때 불렀던 그 노래는 그때 그 자리와 너무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그것이 끝이라고 우린 믿지 않았지. 너 떠난 텅 빈 활주로에 쏟아지던 너의 목소리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예감을 해맑은 웃음 지으며 대신한 너의 슬픔을...’(MBC드라마 ‘파일럿’)

그렇게 신병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1994년 2월의 어느 날, 우리는 너무나 그리워했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바로 곁에 두고 퇴소식을 진행했다. 퇴소식 이후 2시간 여 동안의 자유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잠시 막사로 다시 모여야 했다. 2년 여 동안 나머지 군 복무를 채워야 할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서였다. 보충대에서부터 훈련소까지 같은 길을 걸어왔던 이윤상 훈련병, 아니 이윤상 이병은 나와 같은 연대였지만 소속이 다른 제3땅굴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보충대에서 배웅하던 친구가 말했던 “아무도 안 보이네.”라는 의미를 당시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날 퇴소식 자리에는 가수 윤상과 친분이 있는 노영심 등 뮤지션 몇 명만 조용히 다녀간 것으로 기억한다. 윤상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이 쏠렸던 보충대 입소 당시부터 평온함을 유지하며 시끌벅적한 배웅을 거부했던 것이다. 윤상의 인성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된 순간이었다.


자대로 배치되고 난 23개월 이후 이윤상 병장은 무사히 제대를 해서 가수 윤상, 그리고 작곡가와 프로듀서 윤상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해 나오고 있다.

누구에게나 찬란하고 소중한 젊은 날의 추억이 있다. 나는 이 글을 빌려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가수 윤상, 그가 훈련병 이윤상으로 살아왔던 1993년 12월부터 1994년 2월까지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빛났던 젊음이었다고.


윤상과 함께 했던 그때 그 기억과 함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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