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yd 고종석 Jan 17. 2017

제프 벡 내한 공연을 기대하며

Led Zeppelin과 3대 기타리스트의 상관관계

Jeff Beck 내한공연 특집

Led Zeppelin과 3대 기타리스트의 상관관계  



레드 제플린 성공의 출발과 그 흐름은 그룹 야드버즈의 진화와 그 시기 안에 놓여졌던 수많은 실험과 팽창, 그리고 집약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 큰 전략 안에는 영국 3대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명 뮤지션들이 각 시기와 흐름에 맞게 포진되어 있었다. 레드 제플린의 신화가 점화될 수 있었던 이유와 과정을 이를 토대로 소개한다. 



변화의 시작을, 그리고 자신의 변화까지도 실험했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레드 제플린의 역사는 알려져 있다시피, 전설적인 그룹 야드버즈(Yardbirds)를 전신으로 한다. 기타리스트 앤소니(Anthony Topham)의 주도 아래 야드버즈의 초기 음악은 지극히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초기 야드버즈의 음악적 성품에 변화를 가져온 첫 번째 인물이 에릭 클랩튼이다. 그는 이미 대형 그룹 루스터스(Rooster’s)와 캐시 존스 앤 더 앤지니어(Casey Janes & The Engineers)를 거친 블루스 메이커였다. 그가 야드버즈에서 선보인 혁신성은 이들의 초기 작품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러닝타임의 확장과 연장된 음의 공백을 훌륭히 매운 보다 진보적인 블루스 라인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0살 즈음에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확고하게 다졌으며, 블루스 음악에 관하여 남다른 이념과 입지를 마련했던 그가 가입하면서 야드버즈의 사운드는 점차 블루스와 하드록의 긴요한 결합을 이룬 셈이다. 블루스 음악의 역동적 흐름이자, 향후 싸이키델릭의 근간을 이루는 기법인 레이브 업(Rave Up)을 자체적인 창작으로 변모시킨 에릭의 정제된 테크닉은 야드버즈의 변모한 사운드를 공연 실황으로서 담아내고 있는 [Five Live Yardbirds] 앨범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에릭은 점차 상업적으로 흐르는 야드버즈의 이미지에 식상하며, 1965년 영국 블루스록의 기인이기도 한 존 메이올(John Mayall)이 이끄는 블루스 브레이커스(John Mayalls & Blues Breakers)에 가입하며 그룹을 떠나게 된다. 



끝장날 뻔했던 야드버즈를 구하고 떠나버린, 제프 벡(Jeff Beck) 

에릭의 후임으로 가입하게 되는 제프 벡은 이미 그룹 더 나이프 시프트(The Knife Shift) 등에서 화려한 경력을 인정받은 뮤지션이었다. 야드버즈 가입 시점을 전후해서 제프는 이미 많은 실험적인 음의 시도를 해 나왔으며, 이러한 결과는 보 디들리(Bo Didely)가 1950년대에 선보인 바 있는 피드백(Feedback)의 가능성을 그만의 조직적이고 독보적인 스타일로 완성했다. 특히 그가 선보인 피드백은 엄밀히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이전에 이미 완성된 하나의 기법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야드버즈의 멤버들은 제프의 실험성을 함유한 채 3집 앨범 [Having A Rave Up]을 1965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야드버즈의 변칙적인 행보가 눈에 띈다. 이들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고, 1966년 초겨울에는 의외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산레모 가요제’까지 출전하는 등 여러 각도에서 적잖은 시도를 감행했다. 

1966년 5월 소니 보이 윌리엄슨(Sonny Boy Williamson)과의 협연을 담은 [Sonny Boy Williamson & The Yardbirds] 앨범과 [Over Under Side-ways Down] 앨범을 연달아 발표한다. 특히 후자 앨범에는 ‘Jeff's Boogie’와 ‘Lost Woman’ 등의 명곡이 덧씌워져 야드버즈 최고의 앨범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성공적인 모습 내면으로 멤버들은 제프의 전위적인 음악적 시도에 다소 피로를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은 멤버들의 탈퇴로 이어졌다. 결국 키스 렐프(Keith Relf)와 짐 메카티(Jim McCarty)는 아트록 그룹 르네상스(Renaissance)를 결성하게 되었고, 곧이어 베이시스트 폴 사뮤웰 스미스(Paul Sammuwell Smith)마저 탈퇴하고 만다. 다급했던 제프는 이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랜 친구인 지미 페이지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게 되었다. 그리고 제프는 그와 얼마간의 음악적 동거 이후, 그룹의 프론트맨 자리를 넘겨주고 야드버즈를 떠나고 만다. 



레드 제플린의 성공이 1집부터 가능했던 키 포인트의 집대성. 지미 페이지(Jimmy Page) 

1961년 지미 페이지는 고교 졸업 후, 리듬 앤 블루스 그룹 닐 크리스챤 앤 더 크루세이더스(Neil Christian & The Crusader’s)에 가입하며 음악계에 등장했다. 이후 영국의 권위 있는 그룹 시릴 데이비스 올 스타스(Cyril Davis All Stars)에 가입하며, 독특한 피드백을 주로 한 테크닉을 섭렵해 나간다. 그는 레코드 디렉터 겸 프로듀서로서 일을 병행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지미가 가장 많은 음악적 탐구를 진행한 시기로 분류된다. 이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 내에서 발표된 앨범의 75% 이상이 지미가 세션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으로 쉽게 알 수 있다. 1966년 그는 제프의 권유로 ‘베이시스트를 구할 때까지’라는 조건 아래 베이스 파트로 가입을 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프 벡과 트윈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지미의 가입은 제프에게 끌려가던 야드버즈의 음악적 호흡에 또 다른 발전과 변화의 계기로 작용했다. 제프의 탈퇴 이후 야드버즈는 1967년 최후의 스튜디오 작품인 [Little Games]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레드 제플린의 성공이 왜 1집부터 곧장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기타 파트만 보더라도 지미가 이 앨범에서 분출해 낸 에너지는 여정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실험과 탐색이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이렇다 할 발전을 이어가지 못하던 야드버즈는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미 페이지는 그륩 야드버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되었고, 피터 그랜트(Peter Grant)와 함께 ‘수퍼 하이프 레코딩(Super Hype Recording)’이라는 회사를 차리게 되면서 새로운 멤버 모집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모인 멤버가 레드 제플린 호의 승무원인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존 보냄(John Bonham),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이다. 이들은 초기 뉴 야드버즈(New Yardbirds)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다가,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으로 그룹명을 바꾸게 된다. 야드버즈와 레드 제플린의 기점은 이렇듯 실험과 팽창, 그리고 집약된 전략 아래 형성될 수 있었다. 


원본 출처 : http://www.groovers.kr/column/LOTUSQn

매거진의 이전글 2016년 베스트 재즈 앨범 10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