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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Mar 07. 2024

아픈 모습은 허깨비 본 것으로 칩시다.

 응급실 빈자리를 전전하다 겨우 혈액종양병동에 입성한 날. 그제야 백혈병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나는 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분명 대한민국 육군 상병이었다. 입원 안내를 받는 동안 다시 이등병이 된 것 같았다. 가만히 앞만 보려고 해도 눈은 자꾸 병동을 살폈다. 분주히 움직이는 간호사들은 거침없었다. 전쟁 중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실전같이 훈련에 임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실전 같아도 훈련은 훈련이었다. 이제는 이등병이 아니라 훈련병이 된 것 같았다.


 배정받은 침대에 걸쳐 앉아 짐을 풀었다. 짐을 어느 정도 풀자 문 밖에서 환자들이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나가니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내게 모였다. 당황해서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 그 자리에선 비교적 젊은 중년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다. 민머리를 제외하고는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며 첫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걷는 이유를 물어보니 여기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의 차분한 설명과 응원에 항암 치료는 생각보다 할 만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분명 이 느낌 어디서 느꼈던 것 낯익다. 처음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맞선임을 만났을 때 상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군생활이 할만했나. 아니었다. 긴장을 놓지 않기로 했다.


 첫 항암을 시작하고 오심과 무기력에 시달렸지만 예상한 것보다 심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할만하구나. 별 거 아니네 싶었는데 진짜는 항암이 끝나고 왔다. 항암제 투여가 끝나고 면역력이 없는 상태가 되자 원인을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새벽 시에서 사이가 되면 아팠다.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같기도 하고 목에 묵직한 쇳덩어리가 걸린 같기도 했다.


 의료진에게 아무리 통증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받은 약은 하나 같이 효과가 없었다. 새벽이 되면 변기에 얼굴을 들이박은 채 헛구역질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목 안에 손을 집어넣고 싶었지만 감염이 무서웠다. 목에 힘을 주어 침을 뱉어댔다. 통증이 가래침처럼 튀어나오길 빌었다. 기적적으로 탁하고 변기로 떨어지길 바랐다. 기적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가만히 헛구역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침을 뱉는 것이 살아남겠다는 다짐이 되었다.


 다짐이 통했을까. 그래도 별다른 감염 없이 면역력 수치는 순조롭게 돌아왔다. 목의 통증도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사람이 허약해지면 헛것이 보인다더만, 컨디션이 좋아지니 통증과 공포가 모두 먼 과거에 마주한 헛것들처럼 느껴졌다.


 다음 항암을 하기 전 휴식을 위해 퇴원하던 날 내게 첫인사를 해주던 맞선임 아니 남자가 있는 병실에 들렸다. 어느 순간 복도를 오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누운 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반갑다고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금방 일어날 것 같았다. 헛것들을 빨리 과거에 떨쳐두고 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 입원 하러 올 때는 건강하신 모습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희미해서 나만 알 수 있었다.


 처음 마주했던 날 남자의 건강한 낯빛이 헛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본 남자의 얼굴이 헛것이길 기도했다. 병실을 나서며 지금 본 남자의 얼굴은 헛것인 것을 확신했다. 나는 지금 분명 마음이 허약해져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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