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책임감'에 책임지기.
마지막까지 회사에 남아있던,
물류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얼마 전 소개해준 업체에서,
일하게 됐다는 연락이었다.
회사를 갑자기 정리하게 되면서 마지막까지,
신경이 쓰였던 건 직원들이었다.
대표가 너무도 갑자기 정리를 통보한 탓에,
대부분이 다음 일자리를 준비하기도 전에,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사업종료를 통보받고,
가장 먼저 챙긴 건 거래처였다.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파트너사를 소개해 주고,
영업권이 잘 넘어갈 수 있게 협조했다.
욕도 먹고 멱살도 잡혀가며 끝까지 책임졌다.
다음으로 챙긴 건 직원들이었다.
사업종료를 이야기하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거래처 중 적당한 업체들에 직원들을 소개해서,
채용될 수 있게끔 주선했다.
이직을 원하지 않는 직원들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업무특성상 마지막까지 운영이 필요한 보직이,
물류팀이었다.
물류팀장과 과장 둘이 마지막까지 남아,
그들의 역할을 끝까지 책임졌다.
이미 내가 퇴직한 이후까지 말이다.
팀장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다음 일자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
거래처마다 찾아다니며 구직을 부탁했다.
영업팀장이 가장 먼저 자리를 찾아갔다.
운영팀장도 좋은 보직을 잡아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이 오십을 바라보던,
물류팀장이 소개해준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고,
고맙다는 인사의 반가운 연락이 온 것이다.
휴~ 책임감에 책임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마냥 좋을 줄 알았다.
어깨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전엔 보지 못했다.
막상 짊어지고 나니 도망가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도망가지 못하고 버텼다.
결국은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결말이 왔다.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지금,
다시는 책임지는 일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책임질 수 있는 역량도 자원도 없을 때,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서 있는 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지금이 좋다.
마지막 남은 단추까지 채워지고,
물류팀장에게서,
저녁을 사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 왔다.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다음에 사주시면 편하게 먹겠습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로 얻어먹을 것이다.
그만큼 부담이 없는 지금이 좋다.
빗발치던 입사권유 전화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그 세속의 굴레에 또 기어들어가겠는가?
여기 한 발짝 떨어져서 관조하고 싶다.
안에 있으면 몰입하게 된다.
몰입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보이지 않으면,
별일 아닌 일에도 목숨을 건다.
생명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
내가 아닌 내가 죽어간다.
책임감에 갇힌 일상(反射)을 다 반사하자.
한 발짝 떨어지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에 울리던 알람을 끈다.
싱그러운 햇살을 느끼며 일어난다.
서둘러 걷던 거리를,
천천히 걸어본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깜빡일 때,
다음 불을 기다린다.
빠르게 지나치던 거리의 벤치를 보고,
잠시 쉬어갈 겸 앉아본다.
고개숙여 걸으며 보던 보도블록 대신,
맑은 날씨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매일 챙기던 고혈압약 복용을,
자주 잊는다.
밖으로 나오고 얻은 것들이다.
또다시 이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
마지막 책임감에 책임을 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숨을 내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