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련' 보내주기
전에 일했던 직장.
마지막까지 서로가 신용을 지켰던
거래처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 한 끼 하자는 제안.
사업을 정리하고 퇴사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의미 없이 오고 가는
안부인사조차 견디기 버거워
훌훌 털어버리고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지고자 했다.
먼저 연락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자,
빗발치던 연락도 잦아들며
고요가 찾아온다.
요즘 핫하다는 성수동 근처
불판에 새겨진 그을음만큼이나
오래된 곱창집에 마주 앉아
술병을 기울이고 있다.
한 잔, 두 잔 마시는 술.
서로의 근황이 안주처럼 오고 간다.
거래처 사장은 힘들다는 말뿐.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7년의 시간을 시장에 있으며 깨달았다.
산업의 사이클이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로 접어들면
크게 성장한 몇 개 회사만 생존한다.
나머지 회사들은 연옥 속을 헤매다,
사라져 간다.
그렇게 또 한 사이클이 돌고
쇠퇴기를 거치며 살아남은 업체들도
다시 안주하다 도태되기 시작한다.
다시 새로운 도입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혁신기업이 시장을 장악한다.
계절이 바뀌듯 시장도 순환한다.
시장의 순환 속에 희, 노, 애, 락이 있다.
희로애락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감정이 겉돌기 시작한다.
매몰되어 있는 삶에 번아웃이 찾아온다.
계절의 순환처럼 감정도 돌아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늘 겨울에 살았다.
추위에 몸은 움츠리고 감정이 얼어붙는다.
회사를 정리하고 야인이 된 지금
오히려 마음에 봄이 찾아온다.
다시금 계절이 돈다.
거래처 사장은 돈줄이 말라가는 것을 안다.
가뭄 같은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더니,
오늘은 취기를 보이며 하소연한다.
한 발짝 떨어져 조용히 들어본다.
충분히 공감 가는 이야기들...
거래처 사장은 마음을 알아주는 이에게
더 깊게 더 많이 가슴속 이야길 쏟아낸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알아주는 것' 거기까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괴로움에 매일 술을 마시는 듯하다.
술을 줄이고 평정심을 유지하길 조언한다.
연옥 속에선 생존이 우선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을 외면해선 안된다.
혼자가 아니기에 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힘들다고 현실에서 도망치면
더 큰 고통이 숙취처럼 찾아온다.
그동안 손에 피를 얼마나 묻혔는지
얼마간의 눈물을 쏟아 내야 했는지
지나간 이야기를
담담히 이야기해 준다.
돌아오는 길 씁쓸한 마음.
어느 미련 하나 마음에 남아있던 것인지
다시금 과거로 휘몰아치며
부질없는 후회를 머릿속에 밀어붙인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 텐데...
후회라는 감정에 잠시 마음을 내어준다.
짧은 사유 끝.
서둘러 현실로 돌아와 '미련'을 찾는다.
취기가 깨고
다시금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컴컴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걸어본다.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
'미련'에게 안녕을 고한다.
유난히 캄캄한 새벽.
어둠의 끝에 여명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다 잘될 거라는 '답안지'를 손에 꼭 쥐고
집으로 걸어간다.
돌아갈 곳이 있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미련을 보낸 가벼운 발걸음에
새롭게 희망을 담아 길을 따라 걷는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한다.
'미련'에 담긴
무거운 일상을 다 반사(反射)하고
다시금 새로운 일상에 온전히 집중하자,
따뜻한 봄바람이 느껴진다.
이번 봄은 유난히 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