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反射)

11) 걱정 없이 여행하기

by 경자호

은퇴를 하고 가장 좋은 점은

늘 일상에 강박을 달고 살지만

그래도 외부압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서

다양한 여행지를 함께 다녔다.

그때마다 온전히 여행을 즐기기 어려웠다.

바로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동안 매일 30통 이상은 받았다.

은퇴와 동시에 전화기가 잠잠해지고

한동안은 적응을 못해 작은 진동에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들었다.

은퇴를 한 지 3개월

이제 전화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거제와 부산을 거치는 여행을 했다.

전화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거제의 아름다운 해변과

부산의 왁자지껄한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절약이라는

강박을 제외하고 여행을 묘미를 배운다.

여행을 하면 업무처리가 어려워

여행을 의식적으로 싫어했다.

회사에서 처리하면 5분이면 될 일이

밖에서 전화로 받으면 여러 통을 해야 한다.


거제의 고현시장은 전형적인 상설시장

회, 족발, 육회 맛집이 모여있다.

가장 신선하지만 우선 싼 집을 찾아

이리저리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린다.

그러다 어느 한 군데 발견하고 조용히 간다.

한쪽발을 빼고 살며시 가격을 묻는다.

주인 할머니는

머릿속으로 생각이 많은 듯 버퍼가 있다.

3만 원이라는 말에 냉큼 집어 구매한다.

서울에선 같은 양이면 6만 원이다.

방어회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좋은 선물을 한다.

3만 원은 받아야 할 육회는 18,000원이다.

족발은 10,000원이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숙소로 돌아온다.


물가가 오르며 외식할 엄두를 못 낸다.

최대한 음식을 사들고 숙소에서 해결하고

하루 정도만 외식을 하기로 한다.

거제는 확실히 물가가 싸다.

다음 날 아침 거제 5일장에 찾아간다.

남도의 5일장은 강원도와는 또 다른

유쾌한 분위기가 있다.

고무대야에 생선을 넣고 싼 값에 회를 판다.

회는 술이 없으면 못 먹으니 패스하고

시장 칼국수를 찾아간다.

16,000원에 배 터지게 아침을 해결한다.


가장 돈을 많이 쓴 곳은 외도여행이다.

유람선과 외도 입장권까지 값이 비싸다.

겨울 바다를 유람선을 타고 나가니

갈매기가 따라온다.

하나둘씩 어디서 사 왔는지

새우깡을 사들고 와 손을 뻗는다.

갈매기가 조용히 날아와

새우깡을 하나 낚아챈다.

아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나를 쳐다본다.

나에겐 새우깡이 없다.

괜히 미안해져 속절없이 바다만 바라본다.

아들과 멍하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가족하나가 다가와

새우깡을 몇 개 건넨다.

아이가 조심스레 받아 똑같이 손을 내민다.

갈매기 하나가 날아와 '휙' 하고 낚아챈다.

아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 미소가 진다.

해금강을 바라보고 외도를 돌며

여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렇게 못 산 것이 아쉬웠지만

또 그렇게 못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다 위안한다.

누군가는 힘들지 않냐고 묻지만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산을 운용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도 즐겁다.

다른 생각 없이 빠르게 시간이 지나간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소중한 법.

막상 가지고 나면 금세 그 소중함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산다면

지금 내가 쥔 소중한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바쁘게 지내며 성취감을 느끼던 때도

좋았지만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좋다.


좋은 마음 안고 부산으로 넘어오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부산에 오면 늘 시간에 쫓겨 해운대안에서

맴돌았는데

국제시장, 깡통시장, 보수동 헌책방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광장시장, 방산시장, 옛 청계천 헌책방이

떠오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같은 듯 다른 두 공간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구시가지를 건너

조용히 반겨주는 영도로 넘어가니

옛날의 영광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자리에

아기자기 소품샵과 카페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조금 더 버스를 타고 해녀촌에 도착한다.

제주해녀가 바다를 건너 부산에 정착해

궂은 시간을 보내고 영도에 안착했다.

날씨가 추웠지만 굳이 나가서 먹겠다

고집을 부리고 쟁반을 들고 바다로 온다.

어느 바위 하나에 돗자리를 깔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멍게를 하나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눈으로 입으로 귀로 음미하는 바다 한입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다.

좋은 데이 한잔 걸치고

아이를 바라보니

2만 원짜리 낙지 한 접시를 후다닥

해치운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부모를 닮아

방어회와 산 낙지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

잠깐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숙소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긴 여정

예전 같았으면 일찍 고속도로 타고

무작정 밟았겠지만

아침은 밀양에서, 점심은 문경에서

여차하면 차박하고 가기로 정한다.

천천히 달려 밀양에서 돼지국밥 한 사발

문경에서 커피 한잔

낭만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다.

날씨가 추워 차박은 뒤로 미루고

여유롭게 집에 도착한 일정


미리 짜둔 일정에 대한 강박의

일상을 다 반사(反射)하자

자유가 찾아온다.

일정에 목을 메지 않으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는 여행이다.

일상에서도 자유를 찾고자

다짐하는 하루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