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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달 Apr 19. 2019

1. 문제적 상사 : 일을 미루기만 하는 포워딩 머신

팝업창이 떴다.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일언반구도 없이 메일이 왔다. 그리고 남겨져 있는 짧은 메시지,

“달대리가 담당하도록, 확인 요.”

“…”

업무의 배경이나 처리 방향 따위는 없었다.

지시 자체도 없었다. 심지어 공란일 때도 있었다.

앞이 캄캄해져 뒷목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장이 득실거리는 유관 부서회의를 대신 다녀오란다.

유관 부서 간부와의 피 튀기는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의미다.

흡사 맹수가 우글대는 콜로세움의 사투와 같다.

어찌나 등을 떠미는지, 달대리는 자신의 등에 부장의 손바닥 자국이

붉게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포워딩 머신 같은 상사를 만났는가? 그렇다면 애석하게도 분명 당신의 직장 생활은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상사 맞춤식 직무 설계가 필요하다. 어떤 업무든 담당자별 역할과 일정을 정한 후 시작된다. 당신의 직무 또한 역할과 임기를 새로이 정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직무는 당신이 설계할 것


직무설계의 첫 번째는 역할 정의다. 때로 당신은 상사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당신은 매우 바빠질 것이다. 권한은 없는데 책임만 있으면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타 부서 부장한테 치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온갖 궂은일을 떠맡을 것이다. 상사의 일에 타 부서 일까지 떠맡게 된 당신.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날이 빈번해질 것이다.

 하지만 역량을 향상시킬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세심히 챙겨주는 친절한 상사 밑에서는 온실 속 화초로 자라기 쉽다. 항상 상사에게 입만 벌린 채 잘 다듬어진 일만 받으려고 할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거친 업무가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아프고 힘들지만 견고하게 성장할 것이다.

 이 험난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지혜를 활용하자. 호가호위는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세도를 부린다는 뜻으로, 《전국책》에 그 유래가 담겨 있다.


여우가 호랑이에게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명을 받고 파견되어 온 사신으로 백수의 제왕에 임명되었다. 그런데도 네가 나를 잡아먹는다면 이는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너는 뒤를 따라오며 모든 짐승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을 확인하라.’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여우를 앞장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과연 여우가 눈에 띄기만 하면 모든 짐승들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앞장선 여우 때문이 아니라 뒤에 오는 자신 때문인지를 호랑이 자신도 몰랐던 겁니다.


 사또는 고을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다. 남루한 행인의 품에서 마패가 나올 때다. 마패가 암행어사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패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마패는 바로 상사와의 공감대다. 미리 상사에게 충분히 보고하고 처리 방향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제 당신이 수립한 업무계획은 당신의 의견이 아니다. 상사의 의견이요, 명령이다. 공감대 없이 타 부서 상사와 협의하는 것은 마패 없이 빈손으로 사또랑 싸우는 것이다.

 직무설계의 두 번째는 임기 설정이다. 마패를 쥐고 직책과 직급을 넘어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만큼, 수행 일정은 반비례로 짧게 잡아야 한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당신은 가파르게 소모되다가 결국 탈진해버리고 말 것이다. 다른 짐승을 손쉽게 다루는 게 여우의 능력이라고 생각한 호랑이처럼, 안타깝게도 상사는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며 일을 더더욱 몰아줄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원리를 알면 어두운 터널 끝의 빛을 볼 수 있다. 낭중지추는 ‘주머니 속 송곳’이란 뜻으로,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송곳의 끝은 뾰족하므로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조나라는 초나라에 도움을 청하고자 재상 평원군을 급파했다. 평원군은 빈객과 문하 중에서 20명을 뽑아 수행원으로 삼고자 했는데, 모수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추천했다.

평원군: 선생은 빈객으로 지낸 지 얼마나 됐소?

모   수: 3년 됐습니다.

평원군: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여태까지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으니, 선생은 재능이 없다는 것이오.

모   수: 저는 오늘에야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주머니에 일찍 넣었더라면 송곳의 끝뿐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도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이에 모수가 평원군의 행렬에 합류하게 됐다. 평원군이 초나라 왕을 반나절 동안 설득했지만 구원 승낙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모수가 둘 사이에 뛰어들어 단숨에 단판을 짓고 구원 승낙을 받았다. 초나라가 구원군을 파견하자, 진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포워딩 머신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실력을 다듬는 것이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주머니를 뚫고 미끄러져 나올 것이다.

 혹독하고 치열한 근무환경 때문에 어느새 당신은 실무자로서도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관리자로서도 나름의 역량을 갖게 되었다. 필요한 네트워크도 구축했고, 유관 부서 상황도 훤히 알게 됐다.

 마패를 받아오기 위해 부단히 상사와 대화할 것이다. 그 와중에 상사가 당신의 고충을 이해하고 당신을 더 이상 떠밀지 않는다면 이상적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상사가 변하길 바라는 것도 이상적이다. 타인이 변하길 바라는 것은 이기기 힘든 도박에 뛰어드는 일과 같다.


 상사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그만 벗어나야 한다. 일일이 협의해서 마패를 받아오는 것도 너무나 소모적인 일이다. 이대로는 당신의 체력에 열정까지도 소모되고 말 것이다. 당신은 시한폭탄을 들고 있다. 폭발하기 전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스승을 찾아갈 때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광고에서도 목 아프게 부르짖었다. 상사의 횡포를 버티기 위해 핼쑥해진 당신이 향할 곳은 회복할 여행지가 아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살찌울 멋진 상사가 있는 팀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적어도 상사라면 난관을 헤쳐나갈 예리함, 부족한 부하를 감싸는 포용 등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진 않은가?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당신의 타당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온갖 상사를 만날 것이다. 물론 합리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일찍 내려놓을수록 마음의 평화도 빨리 찾아온다.

 그렇다고 ‘어떤 상사를 만나더라도 참고 버티면 되겠지’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당신이 괴로운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법을 찾자. 해결법이 없으면 탈출법을 찾자.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맹목적 인내가 아니라 직시와 실천이다.


 다행히 나는 정반대의 상사도 만났다. 포워딩 머신의 반대는 일을 주지 않는 상사가 아니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일에 대한 동기를 심어주는 상사다. 일을 적절하게 주지 않으면, 당신의 경력도 개발되지 않으니 그 상사 또한 문제적 상사다.

 상사 S는 직장 생활의 버팀목이었다. 그는 부하에게 일을 시킬 때, 해당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줬다. 때로는 그의 긴 설명이 지루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 듣고,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후딱 일을 처리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듣다 보면 내가 놓친 부분까지 상세히 짚어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그의 말을 잠시나마 지루하게 느낀 자신이 부끄러워지곤 했다. 후배가 의욕을 갖고 현명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준 것이었다. 우리 중에는 이 업무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며 상사를 불평하면서도, 부하에게는 ‘넌 직급이 낮으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부하에게 ‘일하라는 의무’보다 ‘일하고픈 동기’를 먼저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회사는 보다 따뜻한 곳이 된다.



다음 편 : 2. 문제적 상사 : 온갖 일을 수집해오는 고물상


글로는 전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강의 일정 : blog.naver.com/flship/22150021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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